"화장실 갔다 왔어?" "응"
"마스크 꼈어?" "응."
"그럼 먼저 나가서 엘리베이터 버튼 눌러 놓을래?"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고 엘리베이터에 탄다. 아이의 옷매무새와 마스크를 정리해주고, 그제야 나도 신발을 제대로 신고 거울을 본다. 심난한 몰골이지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이다. 이럴 땐 계속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좋겠다. 딸아이와 손잡고 집을 나서는 오전 8시 30분. 코로나 여파로 주 3회 아이가 학교에 가는 날 아침이다.
초등학교 등굣길은 특유의 발랄함(?)이 있다. 제 몸보다 큰 가방을 메고도 횡단보도를 우다다 내달리는 아이들, 내가 보기엔 신기할 게 하나 없는 이름 모를 키 작은 나무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아이(얘는 이대로 간다면 지각일 것이 뻔하다), 뭐가 그리 비밀인지 딱 달라붙어 속삭이느라 가뜩이나 좁은 통행길 정체를 일으키는 단짝 친구들, 엄마나 아빠, 할머니 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 잠이 덜 깬 멍한 표정으로 휴대폰에 얼굴을 파묻고 터벅터벅 바로 옆 중학교로 향하는 중학생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경쾌함이 초등학생에게는 있다.
교문에 들어서고도 몇 차례나 뒤돌아 손을 흔들어야 하는 의례(?)를 마친 딸아이의 책가방이 학교 건물을 돌아 사라지는 순간부터 '이제 자유'라는 해방감이 솟아난다.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자유감(?)이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극희귀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오늘도 무사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불안감 서린 바람은 애써 가슴 깊이 묻어놓는다. 자유라고 해서 딱히 갈 곳이 있는 게 아닌 나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선다.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로 막 천 보를 넘긴 걸음수를 확인하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후 보폭을 조금 넓힌다.
목표 걸음수인 육천 보를 채우려면 오천 보를 더 걸어야 하는데 아파트 단지를 크게 다섯 바퀴 돌면 얼추 맞는다. 속도를 높여 걸으며 둘러보는 단지 안 풍경은 경쾌한 생기가 맴도는 단지 밖 등굣길과는 사뭇 다르다.
먼저 이 시간마다 마주쳐 낯익은 할머니들이 보인다. 하늘색이나 보라색 바람막이 점퍼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작은 크로스백을 맨 할머니는 단지를 작게 돈다. 그 할머니는 대부분 혼자이지만 가끔 그날 우연히 만난 것으로 보이는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걷기도 한다. 버버리 체크무늬 끌차를 끌고 얇은 다리를 무겁게 옮기는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도 있다. 그 할머니는 몇 발자국 못가 끌차를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며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어깨가 넓고 덩치 큰 할머니와 왜소한 체구의 할머니는 늘 함께 걷는다. 주로 덩치 큰 할머니가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할머니는 들어주는 편인데, 늘 누군가에 대한 불만을 성토하는 듯싶다. 마스크를 턱에 걸고 큰 목소리로 울분을 토하는 그 할머니를 나는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간다. 그리고 늘 같은 벤치에 앉아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종이 신문을 보는 할아버지도 있다. 그 할아버지는 내가 다섯
바퀴를 도는 내내 그곳에서 신문을 보거나 담배를 피운다.
남은 삶이 살아온 생보다 짧음이 분명해 보이는 이들. 저마다 파란만장했을 한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아침마다 아파트 단지를 걷는 것으로 건강을 챙기고 소일하는 그들의 뒷모습에 나는 내 부모를, 미래의 나를 겹쳐 그려본다. 마흔 넘어서도 손이 많이 가는 딸을 챙기는데 아직 여력이 있는 내 부모가 저 할머니처럼 끌차에 의존해야만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지켜볼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애달픈데. 그리고 언젠가 저들처럼 늙고 힘이 없어지게 된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남은 생을 견딜까. 그때의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일까.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이고 그게 다 무슨 의미와 소용이 있을까.
아침마다 만나는 할머니들과 대화 한 마디 나눈 적 없지만, 나는 그들로부터 어렴풋이 인생을 배운다. 그들은 가만한 뒷모습을 통해 소리 없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정해진 끝을 향해 기꺼이 걸어가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고. 늙고 볼품없어 보이는 뒷모습 속에 감춰진 자신의 내면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굳건하다고.
초등학생이 등교하고 나면 미취학 아이들이 등원하는 시간이다. 단지 안 어린이집 앞을 지나칠 때는 등원한 아이들을 하이톤으로 맞이하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유치원차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와 엄마, 노란 유치원차에 올라탄 아이에게 손을 흔드는 엄마,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잰걸음으로 갈길을 서두르는 할아버지도 보인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광경 너머로 나는 아이의 병이 발병했던 몇 년 전이 떠올라 애써 고개를 돌린다. 아직도 현재에서 과거를 살고 있는 약해빠진 내가 싫어 속도를 내어 지나치는 마음이 시리기만 하다.
미끄럼틀 한 개, 그네 한 개뿐인 작은 놀이터 앞을 지난다. 늘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이곳은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전동차를 세워두고 앉아 있는 지정석이다. 그 아주머니는 매주 두 번 우리 집에 유산균 음료를 넣어주시는 분인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지만 천성이 싹싹하지 못한 나는 굳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궂은 날씨에는 아파트 처마 아래로 자리를 옮겨 전동차를 지키는 아주머니를 보며 나는 감히 짐작해보기도 한다. 저 이는 어떤 삶의 행로를 거쳐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을까. 유통 기한이 지나 먹지 못하고 버리는 음료가 많아져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고 싶다는 말을 몇 주째 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나는 이날 아침 아주머니를 다섯 번 마주쳤지만 결국 집에 돌아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천사백삼십육 걸음.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걷던 걸음을 조금 늦춘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나무들도 살핀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이것들도 잎을 우수수 떨구겠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 보여도 겨울을 나기 위해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름 내 미친 듯이 살아있음을 자랑하던 생명들이 조금 잠잠해진 이때가 좋다. 모든 것이 왕성한 기운을 뻗치는 여름의 짙푸른 생명력이 나는 부담스럽고 가끔은 무섭다.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스치듯 지나가버리는 이 가을이 조금 더 오래 머물러주면 좋겠다.
하늘을 성기게 가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말간 햇살을 사진에 담아 본다. 이제 육천 걸음이다.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다. 마스크 속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나 역시 이 모든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생생히 느낀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음을 안다. 각자의 생애에 또다시 주어진 하루를 저마다 사는 것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일주일에 세 번, 나는 육천 걸음으로 아침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