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

디디의 이야기

차락차락차락차락...

4월의 어느 주말 오후. 어디선가 봄바람이 불어온다. 교정을 둘러싼 이름 모를 나무의 잎들이 일제히 바람결에 흔들린다. 서울 중구 정동길, 이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자리한 풍스러운 노천극장. 여기 두 남녀가 있다. 같은 직장을 다니며 서로에게 호감이 생긴 그들은 어색한 듯 조금 거리를 두고 계단을 걷는다. 남자는 한 칸 아래, 여자는 한 칸 위에서. 방금 시네큐브 극장에서 본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직장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 잠시 대화가 끊기면 말없이 걷는다. 끊임없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차락차락 소리가 그들을 감싼다. 남자가 계단에 앉자 여자가 그 옆에 앉는다.

"노래 들을래?"

가방에서 mp3를 꺼낸 남자가 이어폰 한쪽을 여자에게 건넨다. 여자는 말없이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청아한 음색과 멜로디가 매력적인 노래, JS가 리메이크한 "종로에서"다. 나란히 앉은 남녀는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듣는다. 멜로디 저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마치 하나의 노래인 듯 배경처럼 옅게 깔려 있다.


이 장면은 서서히 줌 아웃(zoom out)이 되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바람결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나 JS의 '종로에서'를 들을 때면 2006년 그 봄날의 오후가 머릿속에 펼쳐진다. 이 두 가지 소리를 제외한 모든 것은 음소거된 듯한 그날 오후가. 그 남자와는 3년 r가까이 연애기간 동안 거의 모든 것들을 함께 했는데 막상 헤어지고 나니 가장 생생히 기억나는 건 이 장면이다. 함께 한 많은 날들 중에서, 정식으로 사귀기도 전 그러니까 썸을 타던 이날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한 건 왜일까.


누구에게나 지난 사랑의 추억을 소환하는 재생 버튼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나 함께 걸었던 거리, 즐겨 먹었던 음식 같은 것들. 이미 사랑은 떠나갔는데 이런 재생 버튼만이 우리에게 남는다. 평소에는 자취를 감추고 있는 그것은 어떤 계기를 만나는 순간 연기처럼 피어올라 우리를 사로잡았다가 이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그것은 몇 번이나 재생되어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 사랑의 공허함에 잠시 씁쓸해질 수는 있어도 그것은 언제까지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시간의 고요한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주위로 흘러오고 또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간혹 생이 반짝, 하고 빛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저 먼 밤의 항구에서 외롭게 명멸하는 등대의 불빛처럼. 그러한 빛이 존재하기에 또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윤대녕, <시계입구가게앞검문소> 중에서)


며칠 전 터벅터벅 길을 걷다가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익숙하게 그 봄날의 오후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집에 돌아와 JS의 "종로에서"를 들으며, 어쩌면 그때가 나에게는 "간혹 생이 반짝, 하고 빛난다고 느껴질 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잠든 밤, 인터넷으로 이화여자고등학교를 검색해 노천극장 사진을 찾았다. 2006년 4월 이후 15년간 머릿속 영상으로만 그려왔던 그곳을 보는 순간 옅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진 속 계단 어딘가에 스물여섯 살의 내가 수줍게 서있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결에 노천극장을 둘러싼 나무의 잎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차락차락차락차락...


그래, 그때 그곳에서 나는 "반짝"였구나. 나에게도 그렇게 "반짝"였던 순간이 있었구나.


"종로에서"를 반복해 들으며 노천극장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음이 이상했다. 사랑과 삶이라는 것이 이토록 공허해서 서글펐고, 그럼에도 "반짝"였던 순간들이 내게 있었음에 안도했다. 서글픔과 안도감이 뒤섞여 심란했던 그 밤 나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젠가 4월이 되면 그곳에 가보고 싶다. 이제는 갈 수 있을 것 같다. 딸아이와 함께 그곳을 거닐며 이야기해주고 싶다. 이곳에서 엄마가 "반짝"였던 때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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