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홍대입구 그리고 임대문의

나의 살던 고향은,

나는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서 나고 자랐다. 흔히들 '홍대입구'라고 하는 곳이다. 1981년에 태어나 2009년 결혼해 신혼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우리집은 홍대입구 인근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경의선 숲길 부근에 위치한 마포유치원을 다녔고, 서교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중학교(현재는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고 한다)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홍대입구역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리에 있는 아현동 소재 중앙여자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집은 여전히 서교동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던 2000년,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이사했는데 그래도 홍대입구는 집에서 도보로 10분 남짓 걸리는 곳이었다.


왜 이렇게 시작부터 장황한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홍대입구 30년 변천사의 산증인(?)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자면 지하철 2호선 라인 '합정-홍대-신촌-이대'는 내 나와바리(?)였고, 그 일대의 흥망성쇠를 나는 생생히 지켜보았다.


홍대입구. 홍대입구가 언제부터 젊음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그러니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자유로움이 생동하는 발랄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홍대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데모를 했다고 해서 전교생이 수업 도중에 하교를 했는데 당시 매캐했던 최루탄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새벽같이 지하철을 타고 등교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을 하느라 홍대입구가 어땠는지 기억이 선명하진 않다. 다만 학원이나 독서실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겨울 저녁이면, 홍대입구역 길가를 가득 메웠던 인파와 작은 소품을 파는 리어카들, 상점마다 크게 울려 퍼졌던 크리스마스 캐럴이 떠오른다.


요즘의 홍대입구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건 2000년 무렵인 것 같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이겼던 날, 홍대부터 신촌에 이르는 차도 한가운데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새벽까지 놀았던 혈기왕성한 붉은 악마들 속엔 빨간 티셔츠를 입은 나와 친구들도 있었다. 그 무렵은 홍대 어디를 가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당시 홍대입구역 6번 출구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서로 바짝 붙은 채 줄을 서야만 했다. 넘어지지 않도록 발끝을 살피면서. 만남의 광장인 KFC 앞은 누군가 기다리고 만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와 내 오랜 동네 친구들은 늘 홍대에서 만나 먹고 놀고 웃고 울고..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의 배경은 거의 홍대입구와 함께였다.


그 사이 나이가 든 나는 홍대입구와 먼 직장에 다니게 되고 결혼을 하고 다른 지역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 후 한 달에 두어 번 친정에 올 때나 가끔 홍대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놀랐다. 단독주택이나 빌라로 빼곡했던 골목은 소규모 상점들이 다 들어찼고,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된 메인(main) 거리는 곳곳에서 버스킹을 하고 춤을 추고 구경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홍대입구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적했던 홍익대학교 정문 근처에도 유명 클럽들이 생겨 해 질 녘이면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줄을 서 들어갔다. 카페, 음식점, 호프집, 노래방, 클럽은 물론 화장품 가게, 액세서리 가게, 옷가게 등 홍대에 자리 잡은 대부분 상인들은 드나드는 손님들로 늘 분주했다. 언제부턴가는 중국인 관광객까지 합세하더니 홍대는 그야말로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홍대에서 다 수용하지 못한 인파는 인근 상수동, 합정동, 연남동, 연희동까지 흘러들었고 예전엔 주택가, 오래된 기찻길이던 낙후된 그곳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홍대가 흥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쇠락해가던 신촌의 모습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것이 내가 지난 이십 여 년간 지켜본 홍대입구의 변화이다. 나의 십 대와 이십 대 시절이 홍대 거리 곳곳에 화석처럼 묻혀 있다. 홍대입구의 번성은 나의 성장과 함께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지금부터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홍대에 나가보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코로나가 휩쓸고 간 홍대입구는 내가 알던 홍대입구가 아니었다.


평일 오후라 해도 전에 비해 줄어든 인파야 충분히 예상했던 바다. 문제는 사람보다 더 많이 눈에 띄던 텅 빈 상가와 "임대 문의"라는 네 글자다. 한 집 걸러 한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실(空室)이 많았다. 홍대입구역에서 홍대 정문을 지나 상수역까지 가는 길에만 적어도 수십 개가 넘는 "임대 문의" 네 글자를 보았다. 한때 중국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던 국산 화장품 가게들은 폐점한 지 오래인 듯 보였고, 어떤 불황에도 끄떡없을 것 같던 버거킹, 맥도널드, 다이소마저도 영업을 종료했다는 안내판만 을씨년스럽게 붙어 있었다. 그런 대기업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미처 떼지 못한 간판이 무슨 업종이었는지 간신히 알려주는 작은 분식점들, 보세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 등 소규모 상점들이 대부분 폐업 상태였다. '왕만두'라고 쓰여 있는 창문 너머로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은 조리대며 싱크대가 휑뎅그렁하게 놓여 있었고, 옷가게였던 쇼윈도 너머로 한때 갖가지 옷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을 빈 매대만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다. 그 광경이 낯설어 몇 번이나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는지 모른다. 언제까지나 젊고 자유로운 생기로 가득할 것만 같던 홍대입구를, 그날 나는 볼 수 없었다.


방역수칙 준수 면에서는 그 누구보다 모범적인 국민임을 자부하는 내가 되도록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집콕했던 그 2년 사이 홍대가, 홍대로부터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과 그 가족이, 그렇게 쇠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홍대만 이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뉴스 기사로만 접하던 것을 두 눈과 발로 직접 확인하니 무언가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이와 함께 태블릿 pc 액정을 수리하러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던 내 발걸음은 돌아오는 길엔 몇 배는 더 무거워져 있었다.


'COVID-19'라는 바이러스는 우리의 건강과 일상뿐 아니라 생계와 삶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이루는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는데 그동안 나는 대체 왜 이토록 무감하게 있었는지, 부끄러웠다. 나 역시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인 것도 아니면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나의 살던 고향'인 '홍대입구'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며칠이 지났지만 어쭙잖은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날 보았던 낯선 홍대입구 거리가 눈에 선해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그래도 이제 막 '위드 코로나 시대'가 열렸으니 섣불리 희망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자위해본다. 대학교가 개강을 해 학생들이 돌아오고 관광객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다시 예전의 홍대입구만의 활기를 되찾으리라 믿는다. 홍대입구뿐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좀 파먹어 휘어지고 무너졌던 대한민국 곳곳의 상권과 사람들의 삶이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인간을 비롯한 세상 모든 것은 흥망성쇠를 거듭하기 마련이라는, 그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이 새삼 가시처럼 콕콕 박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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