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의 엄마로부터

[밝은 밤], 최은영

_어린 나는 아랫목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다. 외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 간식을 놓으며 앉는다. 그러고는 웅크리고 앉아 방바닥에 떨어진 내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줍는다. 작은 몸집의 할머니는 엉덩이를 끌고 방 이곳저곳을 다니며 머리카락을 줍고 또 줍는다. 나는 할머니의 기척을 느끼면서 간식을 먹고 드라마를 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에 나른해진 나는 TV에서 눈을 돌려 무거워진 눈꺼풀로 할머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까무룩 잠이 든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서울에 사는 내가 전라도 광주에서도 시골이었던 할머니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던 것으로 보면 아마도 방학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외할머니는 말수가 적으신 분이셨다. 한시도 몸을 쉬지 않고 일을 해 몸집이 아주 작으셨는데, 지금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방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도 바닥의 머리카락과 티끌을 줍느라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할머니와의 특별한 기억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18년 1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히려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고 가끔은 꿈에도 나오신다. 꿈에서도 할머니는 엉망인 우리집 주방을 정리해주고 계셨다.

_[밝은 밤]은 할머니가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그리고 엄마를 거쳐 주인공에게로 이어지는 백 년의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여성으로 태어나 삶의 모진 풍파 속에서 아프고 서럽게 살아낸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뾰족하게 예민해진 주인공의 상처를 무디게 해주었다. 그녀는 할머니들을 통해 가슴속에 얼룩처럼 베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서정적이고 차분한 문체. 모든 면에서 최은영 작가다운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4대에 걸친 모녀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도 흐름의 끊김 없이 긴 호흡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마음을 건드리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속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고 했다."(p.14)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p.130)

_아이를 낳아 키우며 나는 '할머니'라는 단어를 새롭게 배워가고 있다. 딸아이의 할머니들, 그러니까 내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를 통해 '할머니'라는 존재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단지 "여자와 노인이 합쳐진 의미에서의 할머니"(은희경, <아가씨 유정도 하지> 일부)가 아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가진 '할머니'의 의미를.

엄마로서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내가 딸아이에게 미처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두 할머니들은 가만히 메워 준다. 사십 년 넘게 딸로 살아왔지만 나는 한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외할머니가 된 친정엄마에게서 볼 때마다 속으로 놀란다. 딸아이에게 그 누구보다 헌신적이신 시어머니를 볼 때마다 남편은 물론 나도 어리둥절하다. 그녀들의 가없는 사랑의 원천은 무엇일까. 오랜 시간 아파온 딸아이에게 할머니들이 없었다면, 아이만큼이나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그녀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견디고 버틸 수 있었을까.

이제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나의 할머니로부터 딸아이의 두 할머니로 이어지는, 내 할머니들의 이야기. [밝은 밤] 못지 않게 소설 같은 그녀들만의 이야기가 새삼 아름답고 애처로워 마음 한구석이 아련하게 아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