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붙여진 이름"과 우리가 "가진 이름"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출퇴근 시간 서울 지하철 9호선. 승강장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줄줄이 꿰인 닭꼬치 같다면 열차 안은 콩나물 시루다. 거칠게 등떠밀려 가까스로 열차 바닥에 두 발을 딛으면 일단 안심이지만 뒤이어 좁은 틈을 비집고 파고드는 사람들로 꼼짝하기 힘들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시선 둘 곳이 없을 때다.그나마 키가 큰 상대방은 어깨 언저리에 시선이 닿으니 다행이다. 눈높이가 비슷한 낯선 이와 서로 시선을 피하는 와중에 그의 숨결까지 느껴질 때면 그냥 눈을 감고만다. 아, 이 사람은 조금만 몸을 틀어주면 될 텐데 왜 이러는 거야, 아니 이 인간은 밤새 술을 마셨나 아침부터 술냄새 풍기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하지만 불만 가득한 내 푸념은 이내 동질감 혹은 연민으로 바뀐다. 당신도 새벽부터 천근만근한 몸을 겨우 일으켰겠지, 직장에서 온갖 것들에 시달려 기진맥진하겠지. 나는 그리고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이 빽빽한 열차에 몸을 싣는 것일까. 느닷없는 인류애(?)에 이끌려 상념에 젖는다.


티끌만한 인연이 닿아 잠시 몸이 맞붙은 채 있지만, 서로 이름도 모르는 낯선 타인에 불과한 나와 그들은, "구름처럼 지나간 흔적도 없이, 혹 비가 되어 내릴지라도 땅을 적시지도 못하겠지."(p.33)


50세의 '주제 씨'는 중앙호적등기보관소 사무보조원이다. 직원 중 한 명은 등기소에서 기숙해야 하는 원칙에 따라 가족이 없는 '주제 씨'가 등기소에 딸린 단촐한 집에 거주하고 있다. 매일 천장 높이로 쌓인 출생기록부와 사망기록부 더미를 바삐 오가는 업무를 반복하는 그의 유일한 취미는 유명인 기사 수집이다. 어느날 집에서 한 추기경의 기사를 정리하던 그는 별안간 한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동안 정성스레 수집한 기사에는 유명인의 기본 정보(가족 관계나 주소 등)가 없다는 것. 그러나 '주제 씨'는 등기소 공무원으로서 호적 기록부를 열람할 권한이 있다. 물론 오직 업무상으로. 게다가 기숙사에서 숙식하는 그는 비상시 등기소로 연결되는 쪽문 열쇠도 갖고 있다. 이또한 공적인 목적으로. 그리하여(?) 세상 소심한 그는 밤마다 몰래 등기소를 드나들며 유명인의 기록부에서 신상 정보를 옮겨 적기에 이른다. 여느 밤처럼 몇 명의 유명인 기록부를 빼내 정리하고 있던 그는 실수로 딸려 온 한 여성의 신상카드를 발견한다. 거기에는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결혼과 이혼 기록 등이 등재되어 있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여자의 출생 기록부!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가 그토록 수집에 열중했던 유명인 백 명의 자료보다 그 모르는 여성의 기록부 한 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는 결심한다. 생판 모르는 그 여자를 찾기로.


우리나라로 치면 동주민센터 민원창구 공무원이 불법으로 개인의 신상 정보를 조회하여 사람을 찾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주제 씨'가 생판 모르는 여자를 찾는 이유는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인과 달리 자신처럼 "구름처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을 그녀가, 그녀의 삶이 궁금했다. 이 책의 속표지를 넘기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너에게 붙여진 이름은 알아도 네가 가진 이름은 알지 못한다."


'주제 씨'는 "붙여진" 것이 아닌 "가진" 타인의 이름을 찾고자 길을 나선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찾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고유성은 세상의 편의에 의해 계속 어떤 범주로, 숫자들로 지워지고 있다. 퇴직 전 출퇴근 길마다 알지 못하는 얼굴들과 부대끼며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내리던 나는, 지금은 학부모이자 전업주부인 나는, 책을 읽고 어쭙잖은 글을 끄적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단지 대한민국 서울에 거주하는 40대 기혼 여성이라는 몇 가지 키워드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고유하며 구체적인 당신도 세상에서는 어떤 범주에 속하는 숫자들로 대변될 뿐이다. '주제 씨'는 불법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그녀의 옛 이웃, 출신 학교, 직장 동료, 부모까지 수소문하지만 그 여정은 순탄치 않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진짜 삶을 알지 못했다. 과연 '주제 씨'는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붙여진 이름"이 있지만 "가진 이름"은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 보이지 않지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 그러나 서로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가 뭘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염려하"지 않는 우리들. 그렇기에 우리는 다행이고 또 불행하다.


아이러니한 세상 속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거리에서 지나치는 "이름" 모를 낯선 사람들이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