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지구상 가장 진화된 종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픽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픽션'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이야기 즉 종교, 국가, 사상, 이념 등을 포함하는데, 인간은 이 픽션을 믿게 되면서 대규모 그룹으로 일하고 싸우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책을 덮어두고 일상을 보내는 중에도, 쉼 없이 내리는 "눈(雪)의 정적 속"에 있는 듯한 환영에 시달리게(?) 했던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다른 종(種)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픽션'을 믿는 힘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반대로 인간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하고도 무서운 능력이 아닐까, 하고.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주저 없이 선택했지만, 책의 첫 페이지를 열기까지 망설였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오래도록 힘들었던 기억이 책에 닿으려는 손길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쩐지 올해를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듯 보이는 '나'는 학살과 고문에 대한 소설을 쓰며 계속되는 악몽과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결심까지 했던 '나'는 어느날 친구 '인선'의 문자를 받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인 '인선'은 고향인 제주에서 목수일도 하는데 작업 중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해 '나'에게 연락한 것이다. 제주 외딴 산간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 가달라는 '인선'의 부탁을 받은 '나'는 제주로 향한다. 소설의 처음부터 등장했던 눈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쉴 새 없이 내린다. 얼마나 눈이 계속 오는지 책이 눈처럼 사르르 녹을 것만 같아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제주의 폭설은 '나'가 '인선'의 집까지 가는 여정을 험난하게 만든다. 거의 동사 직전까지 가서야 가까스로 '인선'의 집에 도착한 '나'는 '인선'의 부모가 겪은 학살, 즉 '제주 4.3 사건'의 참상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씨를 말릴 빨갱이 새키들, 죽여서 박멸하갔어. 한 방울이라도 빨간 물 든 쥐새키들은."(p.297)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빨갱이, 좌파, 우파..그 징글 징글한 것들. 사상과 이념이라는 '픽션'이 인간이 인간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는 것, 그 '픽션'을 광신하는 인간이 활개치고 그들에 의해 살해됨을 무력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인간이 존재했다는 것. 그러나 희망과 신념이라는 또다른 '픽션'의 힘으로 군경에게 끌려간 형제의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을 몇십 년 간 포기하지 않았던 '인선'의 어머니 같은 인간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인간의 외면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지만 그 참사(慘史)는 분명 존재했다는 것. 인간이기에 저질렀지만 인간이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 우리가 작별하지 않아야 하는 것.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제주 '인선'의 집에 찾아가는 '나'의 여정을 소설의 절반이나 할애하여 그토록 절박하고 고통스럽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의도를.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한 자만이 타인의 고통 또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것을."(p.84)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p.133)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p.136)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한다. 그러므로 칠십 년 전 제주의 학교 운동장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차갑게 식은 수백 명의 얼굴들에 녹지 않고 쌓였던 눈과 지금 우리의 머리 위로 흩날리는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모든 것을 뒤덮을 듯 내리는 그 눈은 온기를 잃은 것 위에서는 녹지 않고 얼어버린다. 그러나 살아 숨 쉬며 온기를 간직한 것에는 속절없이 녹아 사라진다.
눈이 오랜 세월 사라지지 않고 돌고 돌아 우리에게 찾아오는 한, 우리가 생생히 살아 숨쉬며 그 눈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한,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