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단절된 듯한 곳이 있다. 누구도 자신의 일이 되기 전까지는 그런 곳의 존재를 모르고 지낸다, 아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가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여름엔 서늘하리만큼 시원하고 겨울엔 건조하리만큼 따뜻하다. 1년 365일 불이 꺼지지 않는 그곳. 적막한 가운데 긴장감과 불안감이 늘 도사리고 있는 그곳. 아픈 사람들과 '아프면 안 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그곳. 바로 대학병원 입원실이다.
'돌봄 노동'은 힘들다. 그중에서도 환자를 돌보는 일은 더욱 그렇다. 간병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몸은 축나고 정신은 피폐해진다. 가족이라면, 사랑한다면, 나서서 자처해야 마땅한 일이므로 아무도 그 노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환자)돌봄 노동'의 행위자는 환자를 돌봐야 하므로 아프면 안 되고 힘들거나 슬픈 기색을 내비쳐도 안 된다. 여기 담도암 치료를 위해 입원한 홀시아버지를 간병하는 며느리가 있다. 지독하게도 무더웠던 그해 여름, 그는 더위의 한복판에서 소름 돋도록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
[자두]는 한국사회 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존재를 그려낸 소설이다. 특히 이 시대 'K-며느리'로서 소외감과 박탈감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도 남을 울분(?)을 생생하게 담은 이야기이다.
'은아'의 시아버지는 20여년 전 배우자와 사별하고 홀로 외아들(세진)을 뒷바라지하며 '박사 아들'로 키워냈다. '은아'가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 그는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왔구나"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결혼 9년차가 된 '은아'와 '세진'은 노력해도 생기지 않는 아이를 굳이 갖지 않기로 합의하고, 시아버지는 조금 서운한 눈치였지만 별말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평온한 듯 흘러가던 그들의 일상은 시아버지가 담도암에 걸려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시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고 섬망증상까지 오게 되자, 그간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실금이 쩍쩍 갈라지며 그들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부서지게 된다.
"그러면 저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용서를 받는 더러운 기분이 들고 말았습니다."(p.91)
더 이상은 스포일러이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이 한번 책을 펼치면 도중에 덮을 수 없는 놀라운 흡인력을 가진 이야기라는 점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장기간 계속된 '(환자)돌봄 노동'이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기운을 앗아가고 결국 황폐하게 만들고야마는 과정을 세세한 변화까지 포착해 섬세하게 그려냈다. 또한 '우리 가족'이라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미묘한 순간에 투명한 금을 긋고 벽을 세우는 시댁으로부터 은근히 배제되곤 하는 'K-며느리'의 억눌린 울화를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작품의 몰입도를 높였다. 생생하다 못해 소름까지 돋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탁월했다.
개인적으로 13년차 'K-며느리'이자 아픈 딸아이 치료를 위해 몇 년간 여러 대학병원 입원실을 수차례 드나들며 '(환자)돌봄 노동'을 혹독히 치룬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한호흡에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소설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울렁거리며 나를 뒤흔드려는 무엇인가를 진정시키느라 애먹으면서 말이다.
대한민국 'K-며느리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