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어둠과 암호들로 빽빽한 숲
[어쩌다 스무 번], 편혜영
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Mar 3. 2022
_"편혜영의 소설은 정교하고 섬세하게 세공된 열쇠를 닮았다. 필요불가결한 단문들로 이루어진 서사를 좇아 맨 끝에 다다른 뒤에야 독자는 눈을 껌뻑이다 이내 탄식하게 된다.(...) 편혜영을 읽는 일은 '비밀과 어둠과 암호들'로 빽빽한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소설가 정이현은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보다 더 명확한 표현이 있을까. 작가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것이다.
_[어쩌면 스무 번]은 편혜영 작가의 여섯 번째 소설집으로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 중 <호텔 창문>은 2019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어쩌면 스무 번>은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홀리데이 홈>은 K-픽션 시리즈에서 이미 읽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같은 소설을 시간을 두고 다시 읽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재미와 깨달음이 있는 법! 다시 읽는 중에 기억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 예전 책들과 비교해보았는데 세 작품 모두 곳곳에 수정된 부분들이 있었다.
이미 발표한 작품도 재수정하는지 의아한 마음에 찾아보니 이 소설 출간을 앞둔 인터뷰에서 그녀는 “잡지에 발표된 소설이 책에 그대로 실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역시 이렇게 꼼꼼한 퇴고를 거듭해야 그녀만의 빼어난 문장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거였다.
_수록된 작품 모두 좋았으나, 개인적으로는 예전에도 리뷰한 바 있는 <호텔 창문>, <홀리데이 홈>과 <어쩌면 스무 번> 그리고 자전적 소설인듯한 <미래의 끝>이 가장 좋았다.
2019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호텔 창문>은 처음 읽을 때도 강렬했지만 다시 읽어도 정말 좋았다. 특히 이 소설은 앞에서 언급한 퇴고 과정에서 꽤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김유정문학상 수상 당시엔 나란히 있던 두 호텔 중 한 곳에 화재가 나 옆 호텔로 불이 옮겨 붙는 설정이었는데 이번엔 애초에 하나의 호텔만 존재했던 것으로 수정된 것이다. 이 화재는 소설에서 비중 있는 장면이라 이 변화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수정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보고 전후 내용을 비교해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 외에도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장 등을 수정한 부분도 눈에 띄어 작가의 치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죄 없이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내적갈등을 정교하게 그려내 읽는 이의 마음까지 무겁게 만든다는 점에서 또다른 수록작품인 <리코더>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지난 리뷰에서 나름대로 자세히 기록한 <홀리데이 홈>. 비뚤어진 인생관을 가진 한 군인과 이를 인식하면서도 결국 그와 다를 게 없는 같은 군인인 아내의 이야기다. 이 작품 역시 K-픽션 시리즈에 수록된 것과 조금 달랐고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수정된 결말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스무 번>은 몇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땐 별로 와닿지 않았으나 이번에 그 매력을 톡톡히 맛본 작품이다. 치매 아버지를 돌본다는 명분으로 형제들에게 돈을 받고 한적한 지방으로 이사 온 부부는 증세가 심해지는 아버지에게 과량의 수면제를 먹이는 등 사육(?)에 가까운 간호를 한다. 아내가 과격하게 아버지를 돌보는 동안 집 옆 옥수수밭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편은 '어쩌면 스무 번'정도 보름달을 보면 이 생활이 끝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10개월 정도만 아버지를 돌보려 했음이 짐작되는 (그 후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부부의 이야기는 무서운 장면 하나 없이 시종 팽팽한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강렬함이 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듯한 <미래의 끝>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리는 부모와 외로운 소녀에게 따뜻한 기운을 전해준 이웃(동방생명 아줌마)의 이야기다. 직전에 읽었던 조해진 작가의 [환한 숨]에 수록된 자전적 소설 <문래>를 읽으며 느꼈던, 작가와 친해진듯한 감흥이 되살아나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설가들은 어쩜 글을 감칠맛나게 잘 쓰는지, 자전적 소설을 읽을 때면 이들의 빼어난 글솜씨에 새삼 감탄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리코더>를 제외한 7펀은 모두 '가족'을 주요 소재로 하여, 가장 가깝고 친숙한 동시에 가장 멀고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가족'의 모순적인 이면을 작가 특유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공통점이 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