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하고 서늘한 위로

[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_마음이 힘들 때면 어김없이 정미경 작가의 소설이 생각난다. 정확하게는 읽고 싶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첫 만남부터 그랬다. 시나브로 그녀의 글이 머릿속을 맴돌 때면 '아, 내가 지금 버겁구나, 지쳤구나' 깨닫는다. 며칠 전 오랫동안 책장 한켠에 두었던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우울감과 막막함이 지속되던 요즘이었다.


[내 아들의 연인]은 2008년에 출간된 정미경 작가의 소설집이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선, 축축한 차가움. 역시 작가 고유의 분위기로 흠뻑 젖어 있어 책을 비틀어 짜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책에는 총 일곱 편의 단편 - 표제작인 <내 아들의 연인>을 비롯해 <너를 사랑해>, <들소>, <바람결에>, <매미>, <시그널 레드>, <밤이여, 나뉘어라> - 이 수록되어 있다.


_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집에서 특별히 인상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이 늘 그렇듯, 눈길과 마음을 오래 붙잡는 그래서 시간이 흐른 언젠가 문득 떠오를 것이 분명한, 문장들은 있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의 문장들.


"이래도, 이래도, 하며 삶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툭툭 던져놓는다. 뾰족한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꽃 핀 길이라고 멈출 수도, 얼음판이라고 건널 뛸 수도 없다."(p.69)


"그가 가고 나서야, 우리는 모두 우주만한 추위를 이고 사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빙하기를 살아갔던 들소들처럼. 어디서, 왜 왔는지는 모르지만, 거기 그렇게 내던져져 온몸으로 추위를 견디며, 얼음 위를 걸어야 하는 것들.(...)들소는 왜 제가 두꺼운 얼음과 끝없는 눈의 벌판 위에 던져지게 되었는지 끝내 알지 못한다."(p.70)


"사랑했다고? 그래, 목숨을 거는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지. 백만 사람에겐 백만 가지 사랑이 있으니."(p.159)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몇 가지는 제대로 배웠어요.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객관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갖고 있는지, 영원히 변치 않는 건 다만 이 초라하고 지리멸렬한 삶 그것 뿐이라는 것도."(p.198)


"내가 여기서, 누구 앞에서 울겠어? 참고 있다 돌아오는 차에서 늘 울었어. 소리내어 엉엉 울면서, 붉은 신호등 앞에선 브레이크도 밟으면서, 눈물이 턱에서 모여 허벅지가 뜨뜻해지도록 뚝뚝 흘러내리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없나, 좌우도 살피면서, 그렇게, 그래도 살겠다고 운전을 해서 저 길을 다시 돌아오는 거야."(p.285)


_"쉬어갈 수도, 건너뛸 수도 없는 삶의 엄혹함에 지쳐가는 우리, 생긴 대로 살아야 하는 쪼잔한 존재들"(p.312)을 처연한 슬픔으로 감싸안는 정미경 작가만의 아름다운 문장들. 언뜻 음울하고 냉소적인 듯 보여도 삶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듬는 그녀의 글이 좋다.

덕분에 비록 쪼잔하고 막막하고 비루한 삶일지라도 그속으로 쭈뼛쭈뼛 다시 걸어 들어갈 용기를 얻는다. 숨거나 도망치고 싶은 수많은 순간에 위안을 받는다. 세상에는 축축하고 서늘한 위로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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