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지 마시기를

[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_오해하지 마시기를. 소설가 정지아의 단편소설집이다. '자본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골치 아픈데 무려 자본주의의 '적'이라니, 라며 거부감이 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내가 그랬으니까. 약 20년 전 경제학과를 졸업했음에도 '경제'라는 단어가 불편한 내가 제목부터 거창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다. 소설가 정지아의 작품이라는 것. 작가를 알게 된 건 [2020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서다. 당시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가의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에 깊은 감동을 받아 조사해 본 바, 한국소설계의 대표적 '리얼리스트'로 알려진 그녀의 대표작은 [빨치산의 딸]이라는 자전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빨치산'. 역시나 강렬한 제목에 망설였지만 일단 전자책으로 구매해두고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아 지금껏 모셔두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들려온 작가의 신작 출간 소식은 무척 반가웠다.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리얼리스트'답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허구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배합한 자전소설과 현세태를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작품들은 뛰어난 흡인력이 있었다.


_먼저 가장 궁금해(?) 할 <자본주의의 적>. 괜한 기우였다. 골치 아프기는커녕 읽는 내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실제 남로당이었던 작가의 부모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이 시대 진정한 '자본주의의 적'이 여기 있었다. 자전소설이라 어디까지가 실재인지 알 수는 없으나 소설 속 작가의 30년 절친인 '방현남'씨와 그 가족, 이른바 "자폐 가족"은 "욕망으로 똘똘 뭉쳐 앞으로 달려가는 것 외에 도무지 멈출 수 없는 우리 불운한 인류의 쉼표"와 같은 존재,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적'이었다. 이들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기를!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아,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편의 시트콤과 같은 이 귀여운 이야기를 안 읽은 사람이 없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면 전달이 될까.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작품 또한 자전소설이다. 정말이지 시트콤처럼 이야기의 모든 상황이 재미있고 사랑스럽다.

앞서 <자본주의의 적>이 웃음을 '새어' 나오게 했다면, 이 작품은 웃음이 '터져' 나오게 했다. 고향의 지방대학에서 강의하며 노모를 모시고 사는 작가에게 들어온 신문사 인터뷰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재미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작가가 느꼈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뜨듯한 무언가가 흘러나와 몸을 덥히는 듯한 충만함"이 독자인 내게도 생생히 전해졌다.


그리고 몇 번을 되읽어도 아름다운 소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지난 [2020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리뷰에서 어쭙잖게나마 언급했지만 별스럽거나 특별한 사건, 장소,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화려하거나 유려한 문체가 아님에도, 이처럼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늘 알 수 없는 삶의 영역과 어쩔 수 없는 인생(운명)의 영역이 엄존하고 있음을 작가는 이토록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애틀란타 힙스터>와 <존재의 증명>은 존재의 본질적 의미보다 '이미지'나 '취향'에 집착하는 현세태를 독특한 방식으로 꼬집는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자신의 이름, 나이, 주소, 인간관계 등 본질적 요소는 깡그리 잊어버렸으나, 최고급 커피나 가구에 대한 제 취향만은 기억하는 이상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인물의 이야기 <존재의 증명>은 특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한평생 정직하게 일한 노동의 댓가로 각질과 무좀으로 뒤덮인 거친 발을 얻은 한 아파트 경비원이 "보들보들한 복숭아 빛깔"의 발로 되돌아가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그린 <계급의 완성>은 세상의 본성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평등과 박탈감을 새삼 깨닫게 하는 씁쓸하고도 먹먹한 작품이었다.


혹시라도 이 어쭙잖은 리뷰를 읽고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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