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 슬픈 갈망

[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

_"좋은 생은 나쁜 노래를 만들어. 나쁜 생은 좋은 노래를 만들고. 그 둘을 다 겪은 사람만이 위대한 노래를 만들 수 있지."(p.310)


소설가 정미경은 총 11권의 책을 출간했고, 그중 유작(遺作)이라고 불리는 책은 3권이다. 작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단편이 표제작이 된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남편 김병종 화백이 집필실을 정리하다가 책더미 속에서 발견해 미완성인 채로 출간된 [당신의 아주 먼 섬], 그리고 생전에 1년간 문예지에 연재했으나 추가 수정 작업 없이, 작가의 말도 싣지 못한 채,연재 상태 그대로 출간된 [가수는 입을 다무네].


몇 년 전 뒤늦게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난 뒤 나는 그의 단독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책을 구입했고, 절판되어 새 책을 구할 수 없는 4권은 중고서적으로 구해 서가 한 곳에 모아두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마음을 내려놓는 게 도무지 힘들 때면 서가의 '정미경zone(?)' 앞을 서성였다. 그러고는 마치 구급약통에서 약을 꺼내듯 그의 책을 꺼내는 것이다. 이미 읽은 책에서 되찾은 문장들로 응급 수혈을 받았고, 읽지 않은 책 중에서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는 행위만으로도 위안을 얻었다.


_중고서적으로 구한 [가수는 입을 다무네]는 내가 읽은 작가의 열 번째 책이다. 아직 읽지 않은 한 권이 남아 있지만, 나는 이 소설을 작가의 진정한 '마지막' 작품으로 삼고 싶다. 예술가로서 문학을 향한 그의 갈망과 번뇌가 이 작품에 가장 흠뻑 배어 있기 때문이다.


28세에 등단하여 11권의 책을 냈지만 문단이나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작가. 그럼에도 그는 집필실로 마련한 춥고 음습한 반지하 원룸에서 치열하게 소설을 썼다. 오후에 나른해진다며 점심을 걸렀고, 의자에 앉으면 긴장이 풀린다고 서서 쓰는 책상을 구해 그 앞에서 대부분의 글을 썼다. 또한 그는 볼펜으로 작은 종이에 하나의 문장을 여러 번 고쳐 써본 다음 비로소 컴퓨터로 옮기는 방식으로 작품을 썼는데 그래서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끄적거린 흔적이 남은 작은 종이들이 한 박스씩 나왔다고 한다.


[가수는 입을 다무네]의 주인공 '율'은 전설적인 음악 밴드의 리더이다. 데뷔와 동시에 천재라는 극찬을 들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그는 어느날 갑자기 예전 만큼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다. 삶 자체가 음악이고 자신보다 음악을 더 사랑한 그는 차라리 입을 다문다.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은 음악을 하느니 철저한 침묵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물론이고 가장 가까운 연인인 '여혜'마저도 침묵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율'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러 가까스로 복귀한 그는 주변의 싸늘한 반응 속에서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햇볕 한 줌 안 드는 반지하 작업실로 가야만 비장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다며 치열하게 소설을 써온 작가와 스스로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음악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고마는 주인공 '율'. 나는 '율'에게서 작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하는데 열중한 작가는 '율'에게 자신의 집념과 열정을 투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과 음악을 향한 이들의 순도 높은 갈망은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런데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그 갈망에는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아닌, 차고 슬픈 기운이 가득한 것 같다. 손을 델듯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 의외로 차가워 흠칫 놀라는, 그런 처연한 갈망.


"슬펐어요.

슬프다.....뭐가?

우리가 몸을 가졌다는 것, 마음도 가졌다는 것.(...)슬픔이란 게 무척 고귀한 감정이란 생각도."(p.125)


_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홀연히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고귀한" 슬픔이 물씬 밴 소설을 지금도, 앞으로도 세상에 내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독자는 아래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을 벅찰 정도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인도나 동남아시아 풍의 화려하고도 조악한 꽃무늬 여름 원피스들이 놀랍도록 싼 가격표를 붙이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곧 지나가버릴 계절의 옷들. 늙거나 젊은 여자들이 리어카 앞에 붙어 옷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의 생에서 내년 여름이라는 시간이 100퍼센트 있을 거라는 그 확신이 놀라워 그녀들을 한동안 바라보다 파란색과 꽃분홍색 옷이 걸린 옷걸이를 빼 들고는 제 몸에 하나씩 대보았다."_<못>, [새벽까지 희미하게],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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