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서투르면서도 서투른 줄 몰랐다.

[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_"걸어가는 길이 황무지 같았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의 기분 때문에 황무지가 된 곳. 아무런 연고 없는 이곳에서 그녀는 익명성을, 고독을 느꼈다. 그와 함께,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어떤 것이 찾아왔다. 아, 하지만 다 끝난 일이잖아, 그녀는 방금 느낀 가벼운 당혹감에 대한 반응처럼,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당혹감은 더욱 커져 갔고, 그녀는 얼핏 알 것 같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자문했다. 생각은 쓸모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감정이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걷는 동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별 이유 없이 억제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맞다. 억제는 9년의 세월 내내 작동했다. (...) 은밀함은 짜릿할까? 그 의문 역시 입 밖에 낸 적 없었다. 앞으로도 그것을 묻는 일은 없으리란 걸 알았다. (...) 캐서린은 온 길을 되밟아 가기 위해 뒤로돌아갔다. 그녀는 적당한 순간을 택해 떠나겠다고 말할 것이며, 그는 이해할 테니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랑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그 또한 알 것이었다."(p.57~58)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 중 <방>이라는 소설의 후반부이다. 타지에서 정처없이 헤매고 다니던 한 여자가 의자가 늘어선 강변에 도착했다. 인용한 내용은 강변을 걷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생각들이다. 대강의 줄거리에 대한 언급 없이 일부를 인용한 것은, 이것만으로도 인간과 삶을 꿰뚫어보는 통찰을 엿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_첫 문장부터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읽었다. 작가의 소설은 느슨히 풀어진 자세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기분 때문에",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어떤 것", "가벼운 당혹감" 과 같은, 나 역시 "얼핏 알 것 같은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앞 페이지를 되넘겨가며 몇 번을 반복해 읽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이렇게 문해력이 부족했던가, 하는 수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오히려 야릇한 쾌감마저 느끼며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강변을 따라 공항 수하물 검사대 같은 터널이 설치되어 있고 그 여자는 그것을 통과해 지나간다. 그러면 공항 직원이 모니터를 통해 수하물 속 내용물을 볼 수 있듯, 나 또한 그녀의 머리와 마음속에 든 미세한 생각과 감정까지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수하물 검사대 역할을 맡은 건 물론 윌리엄 트레버이다.


우리도 지금껏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실제로는 아닌데 "기분 때문에" 심상하지 않게 여긴 나머지 우리는 이를 '기분 탓인가'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에게 찾아온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어떤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얼핏 알 것 같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자문"한다. 그러다가 '에잇, 모르겠다. 생각하지 말자.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면서 회피한다. 그러나 어떤 예감이 드는 건 막을 수 없다. 세상에는 "사랑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노랫말을 씁쓸히 중얼거리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뻔한 예감이 든다. 우리는 앞으로도 아래 문장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그녀는 연민을 감지했고, 의식 깊은 곳에서 그것은 조롱처럼 느껴졌는데 왜 그런 지는 알지 못했다."(P.115)


"그들은 서투르면서도 서투른 줄 몰랐다. 그들은 부주의했으나 부주의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에게 조금은 잘못이 있지만, 딱 그만큼 뿐이다."(p.226)


_[그의 옛 연인]은 [밀회], [비 온 뒤]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이다. 작은 묘사 하나, 스치듯 지나가는 대사 한 줄, 태연하게 개입했다 자연스럽게 빠지는 작가의 메시지 등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긴장감이 좋다. 줄곧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읽어야 하는 짜릿함이 좋다. '좋다'는 말보다 더 정확한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는 알량한 내 깜냥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다음에는 영미 문학권 단편의 대가라고 불리는 작가의 장편소설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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