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네이딘 버크 해리스

_"최고다! 호기심 딱지"라는 EBS 어린이 방송이 있다. 콩트 형식의 이야기를 통해 인체 각 기관의 역할을 알려주는 인체 과학 프로그램으로, 딸아이가 6~7살 무렵 지겹도록 '함께' 시청해야'만' 했었다. 아이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보긴 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인체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아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유익한 방송이다. 여담이지만, 아이가 건강에 해로운 어떤 행위(벌레 물린 데를 긁는다든지, 상처 위에 앉은 딱지를 떼려고한다든지)를 할 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 알지? 호딱(호기심 딱지의 줄임말)에서도 나왔잖아!" 라고 말하면 '하지 말라'는 백 마디 말보다 훨씬 설득 효과가 좋았고, 요즘도 종종 그 '호딱'을 써먹을 때가 있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호기심 딱지", 정확하게는 시즌3의 제18화를 아이 몰래 보았다. 그 회차의 제목은 <스트레스와 코르티솔>. 혹시 가능하다면 해당 영상을 시청한 뒤 이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_우리는 뇌졸중이나 당뇨, 자가면역질환 같은 질병은 순전히 유전적 불운이나 생활 습관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고,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 스트레스도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누군가 '내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당했던 각종 학대 때문에 지금 뇌졸중에 걸린 거야' 혹은 '내가 어린시절 겪은 사고 때문에 지금 당뇨병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내가 어렸을 때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지금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린 거야'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그건 너무 '오버'해서 생각하는 거 아니니?'

다시 말해 직관적으로는 그 상관관계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으나 비약적인 추론이 아니냐는 얘기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소아과의사이자 과학자인 저자는 미국의 대표적 빈민지역인 '베이뷰'에 진료소를 열었다. 그곳에서 근무한 첫 해 그는 약 1000명의 환자를 보았고 그중 2명의 아이에게 자가면역성 간염 진단을 내렸다. 보통은 어린이 10만 명 가운데 3명 이하만 걸리는 매우 희귀한 병인데, 2명 모두 과거에 성학대와 같은 심각한 불행을 겪은 아이들이었다. 각종 학대와 폭력, 약물남용, 총기 범죄가 일상인 그곳에서 아이들을 진료하면서 그는 머릿속을 맴도는 몇 가지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베이뷰'는 기저에 어떤 근본적인 질병을 깔고 있다는 것, 극심한 불행과 질병 사이에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 특히 아동기에 겪은 심각한 역경은 평생에 걸쳐 그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


그는 매일 저녁 공허한 느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끔찍한 학대를 당해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뱃속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꼈다.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고 있지만 그 정도 노력으로는 해결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몇 만 건의 연구논문을 파헤쳐 통계를 확인하고 동료 과학자, 의사들과 함께 다양한 검사 방법을 시도하고 기존 의학 관행과는 다른 방식으로 환자를 진료했다. 결국 그는 알아낸다.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모두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였을 뿐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스트레스와 코르티솔'이 여기서 드디어 등장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에서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 적정한 스트레스는 불안정하거나 위협적인 상황에 우리 몸이 대처하는데 도움을 되지만 문제는 만성적이거나 극심한 스트레스다. 코르티솔이 과다 분비되면 혈압과 혈당을 높이고 인지를 억제하여 기분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또한 수면을 방해하고 몸이 당분과 지방 함량이 높은 음식을 갈망하게 만드는 한편 생식기능을 억제하고 면역계와 호르몬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결국 스트레스 반응 체계에 조절 장애가 생기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아동기의 극심한 불행과 역경이 초래하는 유독성 스트레스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신체기관에 문제를 일으키고,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물려주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부모들에게서 자녀로 대물림되고 있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사들이 그들에게 문제와 치료법을 말해주지 않는 이유는 의사들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책은 뇌과학, 면역학, 후성유전학, 생물학, 임상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도출해낸 유의미한 연구결과와 통계를 증거로 제시한다.


_18세 이전에 반복적이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암에 걸릴 가능성은 2배, 심장질환이 생길 가능성은 2.2배, 만성폐쇄성폐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3.9배, 뇌졸중을 겪을 가능성은 2.4배, 자가면역질환으로 입원할 가능성은 2배 높으며, 기대수명은 20년이 짧다고 한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에 그 답이 나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두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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