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어마어마한 일"

[유령], 정용준


_안다, 알고 있다, 알게 되었다, 라는 말의 의미를 자주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안다' 라는 말을 쓰는 게 조심스러워진다. '알고 있지 않다'고 판명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정도에서 그쳤다면 다행이다. 곡해하여 알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안다'의 대상이 사람이면 더 신경이 쓰인다. 그의 과거와 현재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알고 싶지도 않을까봐. 내가 모르는 얼룩 같은 상처를 지니고도 살아내려 애쓰고 있을까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멋대로 그를 재단하고 판단해버릴까봐.


누구든 저마다 삶에서 나름의 사연과 사정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건, 도의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지만 사람이니까,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너그러움과 여유가 생겼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마른 미소가 지어지면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 그런 것일까.


_열두 명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남자가 있다. 사형을 선고받고 수인번호 474번을 부여받은 그는 자신의 모든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고 심지어 사형을 집행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처절한 참회의 결과는 아니다.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는 그는 삶에 대한 일체의 욕구나 미련이 없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대신 살인을 저질러 그에 대한 죗값으로 죽임을 당하기를 원한다. 이쯤 되면 우리는 궁금하다. 474번이 왜 이러는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다시 말해 그의 과거와 현재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곧 우리는 알게 된다. 불행으로 점철된 그의 과거를. 상실감과 박탈감, 배신감이 그의 삶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을까 라는 연민에 빠져들다 흠칫 놀라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품었던 자신을 탓한다. 아무리 끔찍한 불행과 시련의 터널을 지나왔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면 안되니까. 그 어떤 이유로도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으므로.


"얼어붙은 수면을 깨며 느리게 나아가는 쇄빙선을 보신 적 있습니까? 콰콰콰콰콰콰 부서지며 우는 바닷 소리. 그 기이한 울부짖음을 듣고 있으면 미움과 그리움은 서로 다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p.132)


"일그러진 그림. 기괴하게 조립된 얼굴. 한쪽은 웃고 있고 한쪽은 울고 있습니다. 떠나가고 버려지고. 두 가지 일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고 싶고 죽이고 싶고. 두 가지 생각도 동시에 할 수 있어요.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 가지 감정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p.133)


그러나 474번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의 마음은 씁쓸해진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을 뿐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악인인 것은 분명하나, 그가 지나온 삶을 '알고' 나니 마음이 심란하다. 누군가를, 누군가의 삶을, 누군가가 지나온 과거와 현재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게다가 그마저도 제대로 된 '앎'이 아니었다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온전한 '앎'이 아니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면. [유령]은 '안다', '알고 있다'는 것이, 혹은 스스로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실은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일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소설이다.


_"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도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이하 생략)"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의 일부이다. '안다', '알고 있다'고 하기가 조심스러워지면서부터 이 구절이 자주 떠오른다. [유령]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우리가 매일 이 '방문객' 같은 사람을 만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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