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가득한”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_"삶은 날씨고 삶은 식사다. 소금이 엎지러진 푸른 체크무늬 식탁보 위에서의 점심 식사들. 담뱃잎 냄새. 브리 치즈와 노란 사과와 나무 손잡이가 달린 나이프들."(p.52)


"그들의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p.5 1)


책을 읽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한동안 못 박힌 듯 꼼짝할 수 없다. 삶이든 사람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우리를 이루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정확"하게 묘사하는 문장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그문장이 언젠가 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거나 혹은 가슴에 오래도록 품어온 생각과 감정이라면,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한 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확신마저 든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았다. 40년 동안 크고 작은 곡절을 거쳐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곰곰 되짚어보니 "봄날의 지열" 같은 "미지근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매일의 날씨, 매끼니의 식사, 형태가 없는 빛과 그림자,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 빽빽한 그 어떤 것처럼.


_[가벼운 나날]은 결혼생활을 그린 소설이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희미해진 사랑의 자리에 권태와 환멸, 의무와 책임이 들어서는 동안 아이는 자라고 부부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한 부부의 일대기이다. 부부는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손님을 초대해 술과 대화를 곁들인 저녁을 먹는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생일이면 특별한 파티를 열어주고 얼어붙은 겨울 호수 위에서 썰매를 끌어주고 장식한 부활절 달걀을 정원에 숨기고 크리스마스 선물과 인형극을 준비한다. 일견 더없이 화목해 보이는 삶이지만 그것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삶이었고(적어도 삶을 위한 준비였거나),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위한 삶의 삽화였다. 그들은 서로 말없이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 두 개 버전은 서로 얽혀 있다. 하나는 숨어 있고 다른 하나는 드러난 채."(p.113)


소설은 잔잔하다. "숨어 있는" 삶이 일으키는 몇몇 사건들이 있지만 대체로 느슨하게(?) 이어진다. 많은 식사와 대화가 있다. 가끔 파티를 열고 여행을 한다. 드물게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래서 읽다 보면, 조금 지루한가, 싶은 생각이 든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늦춰진다. 하지만 기시감(?) 같은 어떤 묘한 힘에 이끌려 계속 읽어나가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 조금 지루한가, 싶었던 미지근한 이야기가 그 자체로 삶이어서. 책장을 손에 쥔 채 못 박힌 듯 멈춰 곱씹을수록 인정하게 된다. 페이지 곳곳에 은은한 빛을 발하며 박혀 있는 "정확"한 문장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봐, 이제 그만 수긍하지 그래? 결국 이런 게 삶 아니겠어? 마침내 수긍할 수밖에 없다. 자조 섞인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못해.


_1975년 이 소설 출간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결혼은 수년, 수십 년씩 지속되지만 결국에는 기차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비슷하다. 평원이 있고, 늘어선 나무들이 있고, 저물녘 창에 불 켜진 집들이 있고, 어두워진 마을과 기차역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동물은 죽고, 집은 팔리고, 아이들은 자라고, 그 부부마저 사라진다. 하지만 그 속에 시가 있다."


'결혼'의 자리에 '삶'을 대입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뜨뜻미지근하고 자주 고통스럽고 가끔 행복하지만,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간 뒤 돌이켜보면, "결국에는 기차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비슷"한 것이 삶이 아닐까. 그리고 작가는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는 것, "결국에는 기차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 같은 것을 두고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이 모든 것이 천천히, 지각하지 못할 정도로, 등을 돌리고 서 있을 때 강물이 흘러가듯 그녀를 떠나고 있었다. 알고 있던 모든 것, 모든 사람들. 그래서 모든 슬픔과 행복은 그 사람과 묻히는 것이 아니라, 파편 몇 조각들만을 제외하고 그 전에 사라진다. 그녀는 잊힌 일화들과 이름은 잊힌 얼굴들 속에서 살았다."(p.374)


소설의 제목인 [가벼운 나날]의 "가벼운"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속뜻은 무엇일까. 아무도 답을 맞추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정답이란 게 없는 문제일 테지만, 어쩐지 어려운 숙제를 받아든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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