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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Aug 15. 2022

사람은 말이야..

[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_"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생각해야 하지?"

"바보! 그게 인생이니까. 내겐, 일생 동안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났거든."(p.196)


한 남자에게 "일생 동안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난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한순간에 벼랑 끝에 몰린 그에게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남은 거라곤 사막처럼 황폐해진 마음 뿐. 남자는 딸을 데리고 북아프리카로 떠난다. 아니 도망쳤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_누군가 "일생 동안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불행을 맞닥뜨렸다면 그의 반응은 어떠할까. 저마다 과정은 제각각이겠지만 결국 최종 단계는 '수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행을 수용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불행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면 족한 사람이 있고 일평생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제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끝끝내 부정하다가 마지막으로 밭은 숨을 내쉬며 눈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은 어쩔 수 없고 일어날 일은 어쨌든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수용하는 것이 어렵다.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소설을 읽을 때도 이런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다. 짓궂은 운명이 내던져준 불행을 그 또는 그녀가 어떻게 수용하는지, 어떤 식으로 고통스러워 하는지, 얼마나 번뇌에 시달리는지, 그리하여 수용을 하는지 못하는지. 괴로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엿보는 게 즐거워서는 물론 아니다. 불행과 시련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토록 몸서리칠 정도로 슬프고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그들의 방황과 비참을 통해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그 뻔한 사실이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때가 의외로 많다. 인간이라면,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그 진부한 사실이 위안이 되어주는 때가 많다.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해도, 자신을 무참히 배반한 이에게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위태로운 열망이 있다고 해도, 사하라가 어떤 곳인가. '작살 같은 햇빛과 온몸의 구멍마다 파고드는 모래, 천지간에 펼쳐진 하나의 색채와 완전한 적막, 살갗을 비늘로 만들어버릴 듯한 햇살, 더운 물속에 푹 잠긴 듯 귀가 먹먹해지고 숨이 얕아지는 열기, 모든 것을 뒤덮는 모래폭풍' 이 상존하는 곳 아닌가. 사하라까지 갔지만 남자는 운명이 아무렇게나 던져준 불행을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주보다 무겁게" 여겨지는 어린 딸을 방치한 채 헛된 열망을 뒤쫓아 사막을 헤맨다. 자신은 물론 모두를 파멸에 이르게 할 어리석은 목적을 끝내 포기하지 못한다.


신기루처럼 무가치한 목표를 향하는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뒤따르며 혀를 끌끌 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열망을 헛되고 어리석다고 탓할 수만은 없는 나를 발견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면서도 이해가 되었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그러고도 살아 남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기에, 불행을 제 삶의 일부로 껴안는 건 너무나 참담한 일이니까. 씁쓸하게 지어지는 마른 미소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 엄마의 예언은 왜 모두 어두운 거야?"

"사람의 운명이란 원래 어두운 거란다. 아주 가끔 환한 빛을 발하는 때도 있지만 그건 한순간이야. 애초에 운명의 주관자가 그렇게 만들어놓았으니. 우리 짐작과 달리 신은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거든. 우리가 자족적인 행복에 젖어 있기보다는 끊이없이 자기를 찾고 매달리기 원하지. 한줌의 자비를 달라고, 이 고통만은 비켜가게 해달라고 울며 보채길 바라지."(p.64)


_사람이 삶과 운명을 수용하는 과정을 그려낸 것이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정미경 작가는 그 작업을 누구보다도 처절하고 집요하게 수행한 소설가가 아닐까.


<아프리카의 별>을 마지막으로 작가의 모든 책(작품)을 다 읽었다. 서가 한쪽에 아껴두고 있다가 얼마 전 마음이 힘들어 견딜 수 없었을 때 망설이다 꺼내 들었다. 누가 뭐래도 내게는 고마운 작가다. 절망의 심연에서 헤매던 나를 뭍으로 인도해준 감사한 분. 이런 애정을 가진 일개 독자가 있다는 것을 하늘에 있는 작가가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욕심이 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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