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_새벽 3시쯤 되었을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한동안 책을 내려놓지 못했다. 심장이 막 두근거렸다. 슬프면서도 기뻤고, 가라앉으면서도 들떴고, 건조하면서도 촉촉했고, 모르면서도 알 것 같았다. 찰나였지만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는 확신이 분명 스쳤고, 감동이 벅차올라 넘칠 듯 찰랑찰랑했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을 읽을 때면 어김없이 선물처럼 찾아오는 이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나는 이 작가에게 폭 빠져버렸다.
_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라스모이. 저마다 내밀한 상처를 품고도 묵묵히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사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사람들은 라스모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대부분"(p.9)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어느 여름, 이 조용한 마을에서 금지된 사랑이 은밀히 피어났다. 나이 어린 유부녀 엘리와 외로운 총각 플로리언. (차마 이렇게 일컫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 불륜이다. 하지만 스치는 바람처럼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시작된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나는 내심 흐뭇했다. 어릴적 첫사랑이 떠오르면서 주책맞게 혼자 설레기도 했다. 아래와 같이 겨자 캔, 소금, 옥수수 전분과 같은 평범한 단어들로 그려내는 사랑의 시작을 엿보며 어떻게 마음이 간지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남자가 다시 라스모이에 나타나면 길 반대편으로 갈 것이다. 말을 걸면 가봐야 한다고 할 것이다. 고해성사에서 이런 말을 하면 창피하겠지. 바보 같은 짓이니까, 그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면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려 해봐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남자가 캐시앤드캐리에서 버즈 젤리 상자나 겨자 캔, 삭사 소금 등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그 물건들에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그냥 물건을 넘어선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엘리는 궁금했다. 그 물건들이 다시 예전과 똑같아 보일 수 있을까, 자신이 산 브라운앤드폴슨의 옥수수 전분, 린소 등도 예전 같아질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 역시 같아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자신이 이제는, 그리고 앞으로도, 코널티 부인 장례식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닐까 궁금했다. 그날 남자가 누구 장례식이냐고 물었을 때, 그것이 시작이었지만 엘리는 알지 못했다. 코널티 양이 광장에서 그 사람을 가리켰을 때에야 그녀는 깨달았다. 캐시앤드캐리에서 그가 미소지었을 때도 알았다. 햇살을 받으며 함께 서 있었을 때, 그가 담배를 권하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을 때 그녀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p.74)
그러나 여름이 끝을 향하면서 그들의 사랑을 향한 나의 응원(?)은 점차 불안과 걱정으로 바뀌었다. "좋은 여름을 보냈"지 않느냐고 말하는 플로리언을 향한 엘리의 거침없는 애정은 어리숙하고 위태로워 보였고 이별과 파국이 예견된 사랑이 안타까웠다.
"그는 떠날 것이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p.185)
_ 서로가 서로를 아는 시골 마을. 읍내의 구둣방 주인이 한 남자의 신발을 처음에는 어머니가, 나중에는 아내가, 그 아내가 죽은 뒤로는 두 번째 아내가 들고 오는 모습까지 지켜보는(p.110) 그 작은 마을. 어두운 과거가 드리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묵묵히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 그리고 이것을 가슴 아프도록 사려 깊게 그려낸 윌리엄 트레버의 통찰력과 아름다운 문장들.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럼에도 꿋꿋이 살 수 있겠다는, 묘한 희망이 피어나는 걸 느낄 수 있다.
그해 여름 엘리와 플로리언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작가는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여름의 끝이 다가오는 요즘,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