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Oct 19. 2022

"알고 보면 많은 일들이 고르지 않은 축복이지요."

[축복], 켄트 하루프

_"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가 죽은 거야."(p.279)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문장을 누군가 분절하여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작게 소리 내어 따라해 보았다. 반복해 말할수록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의 뜻을 처음 알게 된 어린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어나 살아 있다가 죽었다. 경이로우면서도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들어 몸을 약간 움츠렸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가. 죽은 거야. /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가. 죽은 거야. /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가. 죽은 거야. /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가 죽은 거야.


_소설은 칠십칠 세의 대드 루이스가 의사로부터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죽을 것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폐에서 시작된 암이 온몸에 전이된 것이다. 대드는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시작된다. 조용하고 느린 일상인 건 전과 같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팔십 년 가까이 "살아 있는 사람"인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홀트'라는 시골 마을에서 55년간 작은 철물점을 꾸려온 대드의 죽어가고 있는 시간은 그 자신뿐 아니라 그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 '영향'이라는 것이 일견 사소해 보일 정도로 극히 정적이다. 대드의 아내와 딸은 슬픔을 묵묵히 감당하며 그를 침착하게 돌보고 오래전 집을 나가 행방이 묘연한 아들은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 철물점 주인의 착실한 삶을 지켜본 이웃들은 그의 소식에 안타까워 하면서도 저마다의 일상을 이어간다. 당사자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소문이 마을 전체에 퍼지는 벽지 마을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비슷하다. 대부분의 나날이 봄날의 지열처럼 뜨뜻미지근하고, 많은 날들이 고통스러우며, 아주 가끔 반짝 행복하다. 아니면 대부분 나날이 괴롭고, 많은 날들이 권태로우며, 아주 가끔 행복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런 식으로,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가 죽는 것이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람 말이야. 대드가 말했다. 그 일은 더 이상 우습지 않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가 죽은 거야. 그의 삶은 (...) 이야깃거리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마땅해."(p.279)


"집들이 있는 곳에 이르면 그는 나무 아래 어둑한 곳에 서서 여름밤이라 열어 놓은 창을 통해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자잘한 드라마, 일상의 순간들. 방을 돌아다니고, 식탁에서 음식을 먹고 일어나고, 푸른빛으로 깜빡이며 어른거리는 TV화면 앞을 가로지르다 이윽고 전등을 끄고 어두워진 방을 나가는 사람들."(p.284)


"밤에 자기 집에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런 평범한 삶.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는 삶이지요. 나는 거기에서 뭔가를 되살리기를 바랐습니다.(...)여름날 밤에 그저 함께 보내는 시간. 이 평범한 삶말이에요."(p.286)


살아 있다가 죽어가는 대드는 차분하고 침착하게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한다. 그의 가족도 덤덤하게 남편과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때로 무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을 배제한 채 인물과 배경 묘사에 치중한 작가의 서술을 뒤따라가다 보면 독자 역시 준비를 하게 된다. 주인공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준비를. 언젠가 죽음의 당사자가 될 자신이 떠날 준비를. 그리고 독자 중 누군가는 사무치게 되새기고 누군가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과 의미를.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디 뻔한 사실인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가 죽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는, 지긋지긋하고 고단하며 때로 조금 행복한 우리의 삶이, 아무리 생각해도 "축복"처럼 여겨지지 않는 그 삶이, 사실은 "고르지 않은 축복"(p.140)이라는 것을.


_"정말 별것 아니었는데 말이야. 대드가 말했다. 그뿐이라고.

뭐가 말이에요, 여보?

아까 상점 앞에서 내가 울었던 것 말이요. 나로 하여금 울음을 터뜨리게 한 그 일 말이오. 거기서 내가 보고 있던 것은 바로 내 인생이었소. 어느 여름날 아침 앞쪽 (철물점) 카운터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 사이에 오간 사소한 거래 말이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 그냥 그뿐이었소. 그런데 그게 전혀 쓸모 없는 일이 아니었던 거요."(p.182)

매거진의 이전글 두 음이 겹치며 내는 화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