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_'레가토(legato)'는 악보에서 둘 이상의 음을 이어서 부드럽게 연주하는 기법으로 "앞선 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음이 이미 시작되는" 연주법이다. 그러니까 앞선 음과 다음 음이 겹치면서 순간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앞선 시대가 소멸되기 전에 뒷 시대가 시작되는 것처럼. 아버지의 삶이 지속되는 가운데 딸의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한 사람의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과거의 흔적 위에 그의 현재와 미래가 겹쳐지는 것처럼. 악기 연주법인 '레가토'를 삶의 영역에서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은 권여선 작가의 장편소설 <레가토>를 읽은 뒤부터다. 앞선 삶과 뒤이은 삶이 포개어지면서 만들어내는 화음이라니. 아름다운 표현이지만, 실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레가토' 기법으로 삶을 연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설령 그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들릴지라도, 그게 삶임을 부인할 수 없다.
_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삶이 지속되는 가운데 삶이 시작된 딸이 있다. 그것도 2022년 10월 현재까지도 빨갱이를 운운하며 서로를 공격하는 대한민국에서. 이제 환갑을 목전에 둔 딸의 평생 목표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던 신념은 오로지 빨치산(partizan)이었다. 그러니 한때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사회주의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는데 국력을 낭비했던 우리나라에서 이 부녀의 삶이 연주하는 화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혁명가처럼 평생을 정색하며 진지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은 것이다. 장례식장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활동 무대였던 구례에 차려졌고, 아버지가 세상과 어우러지며 만든 다양한 인연들이 부고를 듣고 찾아와 빈소를 지킨다. 저마다의 시간 속에 생생히 각인된 아버지와의 추억을 안고. 그 인연들 중에는 잘 죽었다고 침을 뱉는 한때 적이었던 사람도 있고, 어떻게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풀어내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들으며 딸은 생각한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평생을 원망했던 빨치산,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를 그려본 적이 있었던가?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p.249)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p.110)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p.181)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나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p.197)
이제 앞선 세대의 구시대적인 사고와 아버지의 삶은 소멸했다. 사회주의라면 덮어놓고 죄인 취급하며 빨갱이로 몰아세웠던 시대와 일평생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신념을 지켜온 아버지의 삶이 소멸한 것으로, 아니 소멸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소멸한 것일까? 정말 사라져 없어진 것일까? (현재 퇴보하고 있음이 명백하지만) 어쨌든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법으로 보장되는 사회이니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의 분쟁에서 해방된 것일까? 죽음으로써 아버지는 평생을 옭죄었던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된 것일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딸은 '빨치산의 딸'이라는 운명에서 해방된 것일까? 평생의 굴레이자 죄책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에서 해방된 것일까?
앞선 시대와 앞선 사회, 앞선 세대가 연주한 음악의 잔향이 남아 있는 가운데 뒤이은 존재들의 연주가 시작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레가토 기법을 쓰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인생이, 역사가 있을 수 있을까.
_<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뤄지는 3일 간의 이야기다. 그 72시간 속에 해방 이후 현재까지 이어진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가, 결국 국가와 사회와 한몸일 수밖에 없는 개인의 뼈아픈 삶이 시공을 초월해 생생히 펼쳐진다. 정지아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소설을 이끌어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소재에도 피식 혹은 풉 하고 웃음을 떠뜨리며 읽었지만, 책 어디에서부턴가(어쩌면 첫 페이지부터)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평생을 "빨치산의 딸"이라는 주제에 천착(穿鑿)해온 작가의 처절한 삶의 무게가 은근히 전해져서. 죽음으로서 비로소 빨치산이 아닌 "나의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딸의 사무친 회한이 안타깝고 먹먹해서. 앞선 존재와 뒤이은 존재가 레가토 기법으로 부드럽게 겹쳐지며 만들어낸 화음이 슬프고도 아름다워서.
""그때께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것이 이런 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의 유골을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