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_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올해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좋았던 작품은 총 세 편이다. 편혜영 작가의 <포도밭 묘지>, 김연수 작가의 <진주의 결말>, 백수린 작가의 <아주 환한 날들>.
_<포도밭 묘지>, 편혜영
"곳곳에 버려진 비닐 무더기를 보자 고등학교 교실에 두고 온 방석이 생각났다. 솜이 다 꺼진 그 방석은 누가 버렸을까.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뼈처럼 말라버린 포도알을 만지작거리며 서 있는 수영과 윤주를 두고 나는 마른잎을 밟으며 끝까지 걸어가봤다. 죽어가면서도 햇빛을 받은 탓인지 마른 가지와 나뭇잎에서 희미하게 포도의 단내가 났다."(p.34)
나는 편혜영 작가의 팬이다.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 몇몇 소설은 어떤 장면과 문장에서 내가 멈칫했는지, 그때 날 사로잡던 느낌이 어땠는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가만 따져 보니 몇몇이 아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랬다. 주제넘지만 내 생각엔 그의 문장은 흔히 '미문'이라고 칭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동시에 빈틈없이 명료한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게 하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에는 어쩐지 늘 선득한 분위기가 감돈다. 서늘하도록 예리한 문장은 인물의 내면과 이면, 인생의 빛과 그늘을 잠깐의 찰나까지도 포착해 적확하게 그려낸다. 한마디로 딱 내 취향이다.(아무도 관심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사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느껴봤음직한 낙담과 공허감일 것이다. 어디선가 비슷한 내용의 글을 본 것도 싶고. 그런데 편혜영 작가의 통찰력과 저력은 마지막 한 문장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것에 눈길이 이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죽어가면서도 햇빛을 받은 탓인지 마른 가지와 나뭇잎에서 희미하게 포도의 단내가 났다." 이 짧은 문장을 통해 작가는 묻는다.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면서도 햇빛을 받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죽어가면서도 햇빛을 받은 마른 가지와 나뭇잎에서 희미하게 나는 포도의 단내는 삶의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단내를 내뿜고야 마는 어렴풋한 비장함 혹은 숭고함일까. 그러고도 단내를 남기고야 마는 처절함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소설이 건네는 이런 의문을 만났을 때 느끼는 묵직하면서도 짜릿한 느낌이 나는 좋다. 좋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진주의 결말>, 김연수
"방금 제게 하신 질문은 엄마가 죽은 뒤, 그리고 아빠가 치매에 걸린 뒤 제가 저 자신에게 수없이 던졌던 질문들 같은 것이에요. 엄마는 왜 죽었을까? 아빠가 치매에 걸린 이유는 뭘까? 그러면 수많은 답들이 줄줄이 떠올랐는데, 그건 마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쁜 생각들 같았어요.아빠 말대로 내가 아닌 생각들. 그냥 줄을 그어 지우면 되는 생각들. 어느 날 느닷없이 일어나는 재앙은 그런 생각 같은 것이죠.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생각일까? 어쩌면 신이 아닐까? 그렇다면 신은 왜 이런 나쁜 생각들을 지우지 않는 걸까요? 왜 앞뒤도 맞지 않는 이런 일들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일까요?"(p.78)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p.79)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어나는 많은 불행들. 잔인하게도 이해와 수용만 남은 많은 시련들. '엄마는 왜 죽었을까?' '아빠가 치매에 걸린 이유는 뭘까?' 왜 일터에서 일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계속 생길까? 왜 내 딸은 치료법 없는 희귀한 병에 걸렸을까? 왜 하필... 같은 질문들.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남들은 그럴 수도 있다며 쉽게 (잘못) 이해하는 질문들. 타인의 고통과 불행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p.71) 나이 들수록 스스로에게 던지곤 하는 새삼스러운 의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이 소설을 반복해 읽었다.
<아주 환한 날들>, 백수린
"그러고 보면 그 시절, 그녀에게는 틀림없이 앵무새가 전부였다. 앵무새에게도 그녀가 전부였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p.236)
백수린 작가만의 따뜻한 고요함이 은은히 스며든 작품이다. 앵무새를 키우는 할머니. 어찌 보면 평범한 이야기인데 그것에서도 작가는 평범하고 새삼스러운데 신기한(?) 질문을 건넨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것을 잃고 나이 들어가면서도 왜, 기어코, 또,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사랑에 관해선 단체로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지금껏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그 까닭을 알듯 말듯한 내가 신기해 살며시 미소를 짓게 했던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_이렇게 적고 보니 세 소설 모두 내게 평생 풀어야 할 숙제 같은 질문을 건넸다. 어쩐지 푸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는 숙제를.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