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김혜진
_소설에서 얻는 감동은 다양겠지만, 내 경우 전율을 느낄 만큼 감격스러울 때는 '자기 발견'의 순간이다. 여기서 '자기 발견'은 국어사전 상 의미(자기도 모르고 있던 자기의 능력 따위를 찾아내는 일)와는 다른다. 말 그대로 단순히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과거나 현재의 '나'일 수 있고, 과거로부터 이어져 현재에 존재하는 '나'일 수 있으며, 이 모든 '나'를 통해 충분히 짐작 가능한 미래의 '나'일 수 있다. 소설 속 인물에 내가 겹쳐 보일 때 나는 얼어붙는다. 평균 기온이 영하 40도인 북극에서는 물을 부으면 순간 쏟아지는 모양 그대로 얼어붙는 것처럼 책에 시선이 고정된 채 꼼짝도 못하는 것이다. 얼음 동상이 될 때의 감정은 제각각인데 큰 줄기를 이루는 건 위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라는 안도감. 이 경지에 이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홀라당 발가벗겨진 채 수치심과 자괴감, 회한과 슬픔의 터널을 통과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를 낱낱이 살펴보는 이는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타인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아니다. '나'만 알고 있는 혹은 '나'조차도 미처 모르고 있던 밑바닥의 '나'를, 똑똑히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만 눈길을 돌려 외면하고 싶은 날것의 '나'를 주시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_"그녀는 그 불쌍한 고양이를 빌미로 다시금 자기 연민에 빠진다. 그녀는 트럭 아래 웅크린 그 고양이에게서 자신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상기하고, 자신의 가여운 처지를 되새긴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길고양이에게서 자신의 슬픔과 비애, 분통과 울분을 발견하는 건 얼마나 쉬운지. 철저한 피해자 되기. 자신을 향한 이 연민에는 끝이 없다."(p.18)
"안간힘으로 피워내는 잎사귀. 그녀는 흔하고 평범한 나무 한 그루에서조차 고통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스스로가 안쓰럽고 또 얼마간 역겨워진다."(p.45)
"보도블럭의 좁은 틈을 비집고 나온 푸릇푸릇한 풀들이 보인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온갖 것들에서 작은 고통의 흔적이라도 발견하려는 스스로가, 어떤 위안을 찾아 헤매는 스스로가 끔찍해진다."(p.96)
지독한 자기 연민에 빠진 한 여자가 있다. 유명 상담가였던 그녀는 자신이 방송에서 생각 없이 내뱉은 '말'로 인해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수많은 '말' 속에 갇힌다. "의미와 맥락이 무한히 확장되고, 왜곡되고, 중첩되는" 언어들 속에. "심장을 찌를 수 있"는 단어와 문장 속에. 그 '말'을 이루는 건 타인의 '말'뿐만은 아니다. 끝없는 항변과 변명, 호소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전하고 싶은 그녀의 '말'도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외부에서 침투하는 '말'과 내면에서 솟아 넘치는 '말'의 범람 속에 스스로 들어가 자신을 유폐시킨다. 끊임없이 자신을 동정하고 비하하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자신의 고통을 이입하면서. 정처 없이 떠도는 '말'들의 의도와 저의를 의심하면서. 그렇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자신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다. 조금도 벗어"(p.158)나지 못한다.
나는 얼어붙었다 잠시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그녀에게서 내가 겹쳐 보이는 '자기 발견'의 순간이 많았다. 지독한 자기 연민과 동정에 빠져 모든 것에 자신의 고통을 이입하고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몸부림에 가까운 그녀의 안간힘에서 몇 년 전의 '나'를 볼 수 있었다. 자기 연민의 늪에 빠져들게 된 사정은 다르지만 고양이, 나뭇잎, 풀 같은 것들에 어떻게든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이입하려 했던 그녀의 처절함은 과거의 '나'와 일치했다. 그렇게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집요한 자신이 안쓰러우면서도 지겹고 끔찍하고 역겹기까지 한 자괴감과 수치심 역시 똑같았다. 그래서 나는 수치스러웠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오직 나만 알고 있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얼마간 잊은 줄 알았던, 그 시절 '나'를 '나' 혼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웠다. 슬프고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안도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내가 형편없고 한심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감당하기 힘든 불행과 역경에 처한 인간이라면, 인간이기에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이처럼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에 기대어 있는 것이라면 자신은 무엇에 기대고 있는 걸까. 반대로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어떤 이름들이, 어떤 순간들이 있다."(p.300)
결국 그녀는 스스로 헤어나온다. 자기 연민과 범람하는 말 속으로 한없이 침전할 것만 같던 그녀가 페허 같은 자신으로부터 조금씩 빠져나왔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 뾰족한 방법이나 노하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오직 자신만을 향하던 눈길을 외부로 돌려서였는지. 자신과 닮은 다른 생명들과 교감을 해서였는지. 정확히 전달되고 이해될 수 없음이 '말'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아서였는지. 그저 시간이 지나서였는지. "시간이 환호와 야유와는 무관하게 흘러"(p.307)갔기 때문인지.
_'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노매드 랜드>라는 영화가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렌즈"였다며 "누군가에게도 이 소설이 그런 방식으로 읽힐 수 있으면 좋겠다"(p.310)고 말했다. 나는 이 소설을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읽었다. 글자 하나, 문장 하나가, 보이지 않는 행간이 나에겐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렌즈"였다. 현미경처럼 너무도 세세히 '나'를 비춰내 슬프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그 터널을 통과해 안도와 위로를 얻었다.
소설가 김혜진에게 고맙다. 작가의 소설을 읽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