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_다 자기 운명이야.
이 말 앞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이러쿵저러쿵 원인을 따지다가도 이 말에서는 어쩐지 입이 다물어진다. 냉철한 이성과 사고도 이 말 앞에서는 주춤한다. 돌담이 무너져 그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쳤다고 하자. (단지 가상의 사례일 뿐) 우리는 인과관계를 따진다. 멀쩡한 돌담이 왜 무너졌을까? 돌담이 멀쩡했던 게 맞을까? 무너진 잔해를 살펴보니 곳곳에 실금이 가 있다. 실금은 왜 갔을까? 지난 여름 홍수 때문일까? 부실공사 때문일까? 시공사는 어디지? 누군가 술김에 발로 벽을 차서일지도 몰라. 누구지? 왜 술을 먹었고 왜 벽을 찼을까? 돌무더기에 깔려 다친 사람은 왜 하필 그때 거기에 서 있었을까? 약속 장소라면 다른 곳에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조금만 일찍 그곳에서 나왔다면 사고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것은 물론이고 이면에 깔린 원인, 그 원인의 원인까지 샅샅이 파헤친다. 그렇게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 사건을 되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결국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일어난 일은 그냥 일어난 것이다."(p.377)
_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한 가족의 비극은 오래전 아주 잔인한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비극의 원인이 명백해 보였다. 가족은 해체되었다. 저마다 지울 수 없는 얼룩 같은 상처를 안고. 서로 다른 회한은 저마다 다른 죄책감을 낳았고 그들은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이 불행을 초래한 원인은 분명해 보였으므로 가끔씩 일어나는 원통함 역시 자신이 감당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진짜(?) 이야기는 4부(p.239)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세밀화를 그리듯 하나하나 정성껏 쌓아올린 작가의 밑작업(아일랜드의 역사와 골트 가문의 가족사, 비극 이후 각 인물의 일상)은 4부에 접어들면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 채 은둔했으며, 누군가는 늙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딸은 재회했다. 30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와 루시.
"그는 딸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딸에게서 그를 막는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왜 이제야?" 그가 들은 것은 속삭임이었다. 그 말은 그에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 말을 후회하듯 루시는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p.257)
내게 이 소설은 이 대목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여덟 살 루시가 숨지 않았더라면, 루시의 부모가 숲속을 뒤지거나 황망하게 떠나지 않았더라면. 안타까워 하며 책장을 넘기던 내게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제부터가 루시 골트의 진짜 이야기야.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으레 그랬듯이.
비극 이후 노년에 묵묵히 이르는 루시의 삶을 엿보며 나는 허리를 곧추 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불행의 씨앗인 자신은 "사랑할 권리"조차 없다고 여겨 고립을 자처했던, "왜 이제야" 돌아온 아버지를 한때 말없이 책망하기도 했던, 루시는 깨닫는다. "일어난 일은 그냥 일어난 것"이라고.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p.375)으므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이 있기 때문"(p.377)이라고. "게다가 그런 불행에서 거둔 부드러운 열매"(p.373)가 있지 않느냐고.
"그녀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놀라게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방파제에 구식 자전거를 기대놓은 것이 눈에 띄었을 때, 거기서 눈길을 돌리자 한 형체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보였을 때, 우연이 다시 상황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그녀가 그곳을 지나간 것은 우연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밑을 내려다보았을 때 오라일리네 개가 조약돌 해변에 묻다가 싫증 난 옷을 본 것이 우연이었듯이."(p.374)
_우리는 살면서 저절로 혹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삶의 저변에 길게 드리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아무리 애써도 끝내 통제할 수 없는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이 분명 존재하고 있음을. 누군가는 그것을 절대자라 믿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운명이나 숙명, 팔자라 일컫고 어떤 이는 '불평등과 불행의 수수께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경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자주 그런 경이로움에 젖어 낯선 곳에 온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우연과 운명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 모든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성을 껴안고도 기어이 살아내고자 하는 애씀이 존경스러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내고 있는 안간힘이 애처로워서.
윌리엄 트레버는 "운명과 시간이 한 개인의 삶에 조용히 작용하는 방식"을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그려는 소설가라는 평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조용히 작용하는 방식"이다. 우리도 얼마간 알고 있는 "운명과 시간"의 불가사의한 힘이 아니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용기라고도 할 수 있는,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어떤 힘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호흡 한번 한 뒤 또 하루를 살아보겠다고 마음 먹게 하는, 작지만 경이로운 그런 힘이 그의 소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