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너희들은 기생충이다

존재는 감지되는 순간, 제거된다 /

【기밀 보고서】

문서명: H-1376 내부 공명기록

작성자: 내부생명체 0418번 / 공생윤리위원회 임시 위원

문서등급: 최우선 비밀

작성일시: H-1376 주기

작성위치: 위장 제4영역 / 위도 14.77°N, 경도 87.32°E

수신대상: 내부공생체 총회


보고 배경

숙주체(이하 ‘인간’) 내에 거주 중인 제5군 기생군집 내에서 최근 윤리의식에 기반한 ‘공생 파열’ 현상이 감지됨.

기생체 0112, 0263, 0418 등 고지능 개체들을 중심으로 “지속적 자원 남용이 숙주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 대두.

이에 따라 생태윤리 기반 내부 운동 발생. 주요 슬로건은 다음과 같음:

인간이 아파요
우리 모두 인간을 지켜요
공생은 전략입니다


문제의식 요약

기생군집은 오랜 시간 인간의 영양소, 유익균, 내부 조직을 대상으로 생존활동을 유지해 왔음.

그러나 최근 인간 숙주의 면역력 급감, 위장 내 염증 반응, 피부질환 등 이상 징후가 지속적으로 포착됨.

기생체 0418은 이를 “자기 멸종적 생존 방식”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경고를 선언함.

“우리는 인간 내부를 지나치게 탐식해 왔다. 임계점이 가까워진다. 인간이 파괴되면 우리는 공기 중에 방출되고, 사멸된다.”


행동 변화 및 사상 확산

0418 주도로 ‘공생윤리위원회’ 구성. 내부 통신망(소화신경망 기반 공명통신)을 통해 선언문 배포.

‘비활동기 절식 운동’ 및 ‘장내 생태 복원 프로젝트’ 진행.

그러나 극소수 기생체(일명 "영양 우선주의파")의 반발 존재.

“인간은 그저 자원일 뿐.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분열 조짐.


부작용 보고 및 노출 가능성 평가

기생군집 내부의 ‘공생윤리 강화 운동’은 의도와 달리 숙주체의 생리적 이상 반응을 야기함.

특히, 장내 미생물 균형 복원 과정에서 발생한 일시적 발열, 식욕 저하, 복부 팽만 등은

인간 의료기관의 관심을 유도하는 단서가 되었으며,

일부 숙주체는 해당 증상을 “이상한 내장 불균형” 혹은 “기생충 감염 의심”으로 자각하게 됨.

기생체 0112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제출함:

“우리는 인간을 위해 움직였지만, 그 움직임이 인간에게 ‘무언가가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불안을 자극하게 되었다.”

또한, 선언문 중 일부는 장내 소리 공명 신호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발성기관에 영향을 주어

소화 불량, 헛구역질, 식후 이상 행동 등의 반사 반응을 유발하였고,

이로 인해 숙주체가 자가 검색 행동(‘기생충 증상’, ‘장내 이상’, ‘해충약’)을 수행하게 되는 유도 조건이 형성됨.

즉, 기생군집의 윤리적 운동이 역설적으로 ‘숙주체의 탐지’를 유도한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됨.

이는 이후 발생한 임계사건(해충약 복용)의 주요 전단계로 해석됨


【비상 대응 보고서】

문서명: H-1376 주기 임계상황 기록

작성자: 내부생명체 0263번 / 공생윤리위원회 생존기록담당관

문서등급: A-0 / 비상 대응 등급

작성일시: H-1376 주기 + 4시간

작성위치: 위장 제2서식권 / 남부 대장 연결부 하단

참조문서: 『H-1376 내부 공명기록』 (0418번)


상황 개요

본 문서는 『H-1376 내부 공명기록』 이후 12주기 이내, 숙주체(‘인간’)가 급작스러운 행동 변화를 보이며

기생군집 전체에 치명적 영향을 준 사건에 대한 기록 보존 및 잔존 개체 생존 판단 기준 수립을 목적으로 작성됨.


임계 사건 보고

H-1376 주기, 인간 숙주가 급격한 판단을 내려 해충약 투여.

약물 이름: 메트로니다졸 / 복용 위치: 위장.


투여 직전, 인간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기생충 제거 방법”을 조회했고,

그 과정에서 발화된 인간의 음성 명령과 디지털 화면에 표시된 문장이

우연히 소화기관 내부의 공명 진동을 통해 기생군집의 감각 범위 내로 전파됨.

기생체들은 화면에서 빠르게 깜빡이는 자막과 음성 주파수를 해독한 결과,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식함:

“기생충 박멸.”

이 문구는 생존 의미론 체계상 ‘자기 존재의 외부 인식 및 제거 명령’으로 해석됨.

30분 이내, 다수 기생체 용해 및 사멸.

잔존 개체들은 점막 틈에 은신 중이나 통신 능력 상실로 사실상 절멸 상태로 분류됨.


결론 및 추론

기생체는 ‘숙주의 인식’이라는 결정적 요인에 의해 절멸됨.

존재는 감지되는 순간, 제거된다.

이는 우리(기생체)뿐 아니라, 더 큰 차원에서도 적용 가능한 원칙임.


【인간의 메모】

작성자: 분류불가 인간 개체 A-4172

시점: 21세기 중반 / 지구 내부


아침 7시 46분.

나는 늘 그렇듯 브라질 세하도 원두를 아주 굵게 갈아 커피를 내렸다.

신맛이 거의 없고, 쓴맛은 남지만 부드럽게 떨어지는 바디감이 마음에 든다.

어릴 적, 외갓집 아궁이 앞에서 맡았던 나무연기 냄새와 비슷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무가 천천히 타면서 내던, 그 안온한 냄새.

그리고… 기묘하게도,

나는 그 냄새 속에서 소멸이 아닌, 지속을 떠올리곤 했다.

커피가 식기 전에, 나는 실험실로 내려갔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지구 내부의 미세 생명체 군집에 대한 정량적 이해다.

우리는 생태계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시적 사건들은 대부분 통계적 평균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나는 믿었다.

그들, 아주 작고 오래된 존재들은 우리보다 먼저 지구를 살아온 이들이고

그 내부 어딘가엔 문명과 닮은 리듬, 자기 조직화된 윤리,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향의 이성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개발했다.

양자역학적 생체 관측 연결 기술 (QLEC: Quantum-Linked Entangled Consciousness)

장내에서 일어나는 신경 반응과 전자기 소음을 양자 얽힘 상태로 확장시켜,

그들이 실시간으로 교류하는 사념의 조각을

AI 기반 언어 신경망을 통해 해석해 내는 실험.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신호 하나를 해독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그러나 그 누구도 들은 적 없던 ‘그들의 대화’였다.

기생충의 보고서를 읽었다.

아니, 보고서라기보다 고백문 같았다.

기생체 0418이라는 존재는 자기들이 인간을 어떻게 갉아먹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고,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공생을 모색했다.

그들의 구호는 낯설지 않았다.

“인간이 아파요”

“우리 모두 인간을 지켜요”

이건 마치 우리가 늘 외쳐대는 것과 똑같았다.

“지구가 아파요”

“지구를 지켜요”

어쩌면 이 말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다.

우리는 ‘지구를 위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건 ‘우리를 위한’ 말이었다.

마치 기생충들이 인간을 살리려 했던 이유처럼.

그건 공생이 아니었다.

지속 가능한 착취였다.

나는 보고서를 덮고, 창밖을 보았다.

올해 초, 공기 중 산소 농도가 0.2% 낮아졌다는 발표가 있었다.

해양의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이상하게 급증했고,

어떤 식물종은 광합성을 멈췄고,

북극 빙하는 이전보다 천천히 녹고 있었다.

지구가 무언가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제야 느꼈다.

지구는 지금 해충약을 먹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바이러스일 수도, 급격한 기후일 수도,

생태계의 자기 복원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지구가 우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

보고서 마지막에 쓰인 문장,

“존재는 감지되는 순간, 제거된다.”

우리가 이 문장을 쓰고 있을 때,

지구는 그걸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감지되었다.

이제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이다.


※ 본 작품은 『삼체』 재독 중 떠오른 사유에서 비롯된 단편입니다.

존재의 인식이 곧 절멸로 이어지는 우주의 법칙에서 착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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