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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온 Oct 24. 2024

90년대가 그리울 때

90년대 한국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너무 갑자기, 느닷없이, 뜬금없이 Sarah Vaughan의 A Lover's Concerto 가 너무 듣고 싶어졌다. 그게 시작이였다.


오랜만에 들어서인가..3번, 4번 이 곡을 듣고 또 듣다, 내일은 10월 황금연휴니까 쉬겠네..하는 생각이 들며 이 곡이 메인 OST로 쓰였던 영화 '접속'을 보기로 했다. '접속'을 시작으로 3일간 '미술관 옆 동물원', '내 마음의 풍금', '8월의 크리스마스' 까지 90년대 한국 영화를 4편이나 보게되었다. 너무나도 피곤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오래된 영화들이 주는 감성에 그저 행복했던 시간들이였다.


솔직히 주변에서 아무도 믿지 않지만, 대학 때 전공이 '영화 분석학'이였다. 20대 초반엔 언젠가는 영화 평론가가 되기로 맘 먹고 야심차게 공부했지만, 내가 크게 소질이 없다는 부분에 대한 절망 그리고 취업의 압박에 영화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났고, 언제 영화를 좋아했는지 무색할 정도로 피곤해서 퇴근하면 침대에 드러눕기 바빴다. 무언가 새로운 걸 보고 습득하고 받아들이는 자체가 괴롭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피곤한 날이면 여전히 그렇게 느끼곤 한다).


요즘 나오는 영화들은 영상미도 스토리도 너무나 튼튼하고 세련되었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사람 냄새 나는 영화를 만나보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뭔가 우리가 사는 삶과 너무 동 떨어져 있거나 아님 너무 정형화된 사회를 보여주기 급급하다는 극과 극의 컨텐츠를 하루 종일 소비해야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시대가 변하고 그 시대에 맞춰 모든것들이 변해가는 것이 맞지만, 아직 내 멘탈과 내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걸까.. 너무 피곤했다 그냥.


그리고 사실 영화를 전공했음에도 영화쪽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조금의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다. 간혹 현업으로 필드에서 뛰고 있는 몇몇 학교 동기들을 보면 '힘들어도 내 꿈을 이뤄나간다는 성취감이 있겠지?' 자문하며 그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보기도 했었다. 사실 남들에게 보여주기 무서웠던 동기들에 대한 부러움도 함께 더해져, '영화' 자체를 좀 멀리했던 점도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역시나 사람은 나를 어루만져주는 곳으로 돌아온다고.. 다시 돌아왔다. 돌아올 시기가 언제인지 몰랐지만, 이렇게 어떤 노래를 듣다가 다시 영화가 보고 싶다, 다시 그 속으로 빠지고 싶다 생각이 들줄은 몰랐다. 참 희안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감성과 취향과 마음은 90년대에 머물러있다.


생각해보면 90년대에 내가 뭘 알았다고 90년대에 이렇게 집착하지 싶었는데, 90년대에는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요소가 정말로 작용했고 작용 가능 했던 마지막 시기라, 그 시기를 그리워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우리의 삶은, 우리가 접하는 모든 컨텐츠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 트렌드라는 것들은 너무 빨리 움직이고 빨리 소비되고 빨리 소멸된다. 난 그게 힘들었던 것 같다.


90년대 영화들에서는 지금 현실에서는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예전의 다소 '느린' 감성들과 '기다려야만 했던' 순간들을 화면으로나마 다시 볼 수 있어, 계속 마음에 새겨두고 또 새겨두는게 아닐까 싶다.


영화 '접속'만 봐도 전화선을 꽂고 인터넷이 가동되는 이 모든 시간을 기다려 상대방과 소통했고, 그 기다림의 미학이 있기에 더 고민하고 더 배려해서 상대방을 대했던 것 같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을 보면, 지금처럼 언제든지 전화하고 문자해서 오해를 풀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없는 '집 전화' 하나에만 의존해야했기 때문에 더 내 속마음을 절박히 진실되게 풀어나가려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는 어쩌면 극중 한석규의 죽음을 영영 알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였다면 동네 카페나 커뮤니티 혹은 인스타에서 조금만 검색하면 바로 찾을 수 있기에, 바로 알았겠지만 말이다.


물론 다시 90년대로 돌아가서 모든걸 기다리고 인내하며 살라하면, 답답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가끔은 '알지 않아도 될 것',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것'에 대해 내가 눈을 닫고 귀를 닫을 수 있는 자유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살아내야하는 2024년은 ..그런 자유를 줄 틈 조차 없이 바빠보인다.


90년대 한국영화 지금보면 참 촌스럽다. 90년대 특유의 말투도, 그리고 35년전의 모든 것들이 어찌보면 색바래고 세련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90년대를 살아온 이들이, 치열하게 하지만 낭만 가득히 심어놓았던 90년대 감성이 주는 따뜻함과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도 촌스러워 질 수 없는 것 같다. 그게 헤어나오려고 해도 계속 그리워지는 90년대가 주는, 90년대 한국 영화가 주는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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