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우대 받는 AI시대 7
결혼 후, 우리가 얻은 전셋집 주인이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신혼 초, 나는 직장을 그만 둔 터라 하루가 지루했다. 대기업 패션 디자인팀에서 일하며 바쁘게 살던 시절과는 딴판이었다. 그 시절엔 결혼하면 여자는 직장에 사표를 내는 게 불문률 이었다.
갑자기 한가로움을 견디기 어려웠던 나는, 자연스럽게 주인집 미용실을 기웃거렸다. 늘 분주한 미용실 풍경이 신기했고, 원장님의 가위질이 마법처럼 보였다. 손끝에서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모습이 멋있게 보여서 내 손이 간질거렸다.
"미용 한번 배워볼래요?"
원장님의 제안은 솔깃했다. 아기도 없고,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미용기술을 배워 가족들 머리라도 잘라주면 좋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학원에 등록했다. 그 결정이 내 인생 초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만 해도 마네킹으로 연습하는 게 아니라 학원생들끼리 서로 머리를 대주며 연습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를 자르고, 감고, 말리고, 펌을 하고, 또 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머리를 실험대 삼아 연습하다 보니, 머리카락이 비쩍 마른 풀처럼 푸석푸석해졌다. 손톱으로 훑으면 머리카락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혹독한 6개월이 지나 자격증을 땄고, 나는 자격증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겁도 없이 미용실을 열었다.
미용실 보조도 안해본지라 기술 좋은 미용사를 구하려고 이태원까지 찾아가 스카우트했다. 내게 기술을 전수하면 봉급의 30%를 더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 미용사는 아이롱(고데)으로 드라이 웨이브를 만드는 기술이 손끝에서 꽃을 피우듯 마술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미용사는 미군을 만나 미국으로 가서 살 거니까 기술을 다 가르쳐 준다며 열심히 배우라고 했다. 미용이 내 길이 되는 운이었던지, 필요한 시기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신의 전령인듯 축복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아이롱으로 머리카락 뜸을 들인 후 식기 전에 왼손가락으로 비벼서 꽃송이처럼 웨이브를 만들어야 하는데, 뜨거워서 손가락으로 비비지를 못하고 손에서 놓치면 뻗쳐 버린다. 그 때 아이롱(고데) 손님이 많아서 미용사는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배겨서 직업을 속일수가 없었다.
미용사가 노랑머리 미국 아가씨에게 머리를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이태원 미용실에서 미국 아가씨 머리를 하다가 태워 먹은 적이 있어요."
윤기가 흐르는 금발 머리에 아이롱 웨이브를 넣으려다 온도를 높게 하는 바람에 머리카락 한 움큼이 뚝! 끊겼다. 순간 당황했지만, 노련한 디자이너 답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타버린 머리카락을 발로 쓱쓱 밀어서 의자 속으로 넣어 버렸다고 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그 미국 아가씨는 거울을 보며 주렁주렁 웨이브진 머리를 흔들어 보고는 만족한 듯 팁까지 주고 갔다.
서양인 머리카락은 가루처럼 부스러지는 분사형 타입이라 약한 열에도 쉽게 탄다. 동양인 머리카락은 과립형으로 두껍고 질겨서 200도 이상 온도를 높여야 컬이 제대로 들어 간다.
미용은 머리카락을 조형 예술로 아름답게 만지는 손 기술 뿐 아니라, 머리카락의 성질까지 이해하고 펌약, 염색약도 조제해야 하는 과학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용실을 오픈 하면서 동네에 먼저 자리 잡고 있는 미용실과 이웃 가게에 떡을 돌렸다. 먼저 자리잡고 있던 미용실 원장이 시큰둥하게 떡을 받아서 미용 다이에 던지며 물었다.
"미용기술 배운지 얼마나 되었어요?"
"면허 딴지 몇 개월 안 됐어요. 저는 기술이 없어서 미용사 두고 하려고요."
그 원장은 동네 사람들에게 저 미용실 원장은 기술도 없는 초보라 삼 개월도 못 버티고 문 닫을 거라고 소문을 냈다. 그런데 일 년도 못 가서 노처녀인 그 여자가 문을 닫고 떠났다.
나는 기술이 없는 대신 손님에게 친절하게 최선을 다했다. 기본기가 약해서 기술을 제대로 배우려고 일본 미용전문학교 일 년 코스 강사 과정을 공부했다. 그리고 미용 세미나만 있으면 늦은 밤까지 쫓아 다녔다. 그때는 프랑스나 홍콩으로 가야 기능장 과정을 체계적으로 공부 할 수 있었는데, 해외까지 쫓아 다니며 공부했다.
그 시절만 해도 사람끼리의 정이 있어서 우리집은 고객이 미어 터졌다. 미용사 기술도 좋았지만 장사를 하라는 운이었던 듯 늘 고객이 많았다.
장사라고 처음 해 보는지라 고객을 맞이 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가게 문 열고 손님이 들어오면 나는 뒷문으로 도망갔다. 그러면 미용사가 나를 부르러 왔다. 미용기술은 유행을 따라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그 시절에는 파마를 하면 커트도 무료로 해 줬고 손톱소제인 네일 아트를 서비스로 해 줬다. 내가 파마를 말면 언니가 고객의 손톱을 따뜻한 물에 불려서 손톱 거스름을 자르고 메니큐어를 발라주면 파마가 거의 끝난다. 손님 얼굴이 익을 때까지 뒷문으로 도망가서 언니가 손톱을 물에 불리고 손님을 붙들어 놓으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파마를 말았다.
기술이 없던 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보았다. 술집 나가는 아가씨들 머리하기가 까다로웠는데, 드라이 할 때 얼굴이 데일까봐 두피 가까이 드라이기를 못 대고 설렁설렁 했더니 머리가 맘에 안 든다고 바로 세면장으로 가서 머리를 박박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미용실 보조도 안해보고 기술없이 가게를 열면서 그런 고객을 만나면 자존심이 상해서 셔터를 내려 놓고 울기도 하고 가슴 앓이를 많이 했다. 어떤 날은 꿈에서 머리하는 기술을 배우기도 했는데, 자다가 일어 나서 꿈에서 배운것처럼 해보면 신기하게도 머리가 잘 되었다
결혼식에 간다고 찾아온 고객에게 올림머리를 해 줬는데, 미용실을 나가는데 실핀이 툭툭 빠지고 올림머리가 다 쏟아질 것 같았다
'제발, 버스 탈 때 까지만이라도 쏟아지지 마라'
그 시절 헤어 미용기술은 커트, 퍼머, 올림머리, 염색, 메이크업, 네일아트, 피부미용까지 종합으로 다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초창기 미용사 자격증 시험 본 사람은 일반 종합자격증이다.
기초도 부족한 내게 머리 잘한다고 버스까지 타고 오는 고객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고 고객에게 최선을 다한다.
하루하루 고객과 함께 하며 사람들의 인생을 조금씩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취미 삼아 배운 기술이었지만, 평생을 함께 할 만큼 매력 있는 직업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설레는 마음으로 미용실 문을 열고 사 십여년 고객의 애환까지 함께 나누는 헤어디자이너가 좋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직업,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 버린 삶에 황혼이 스며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