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폼생폼사, 그 허망함에 대하여
사람은 대부분 가면을 쓰고 살아 간다. 사회적 역할에 따라, 때로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혹은 본 모습보다 더 좋게 보이고 싶은 욕망으로 가면을 선택 한다. 그러다 그 가면이 너무 화려해지면, 본성을 잃고 만다.
서울 언니 집을 가려고 1호선 전철을 탔다. 운 좋게도 출입문 옆 좌석이 비어 있어서 앉았다. 등을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려는 데, 눈앞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가 헝클어진 남자 모습이 낯익은 얼굴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덥수룩한 수염, 낡고 때 묻은 하늘색 누비 옷. 마치 길에서 주운 옷을 걸친 듯 남자는 초조하게 칸과 칸을 오갔다. 처음에는 그저 떠돌이 노숙자인 줄 알았는데, 곧 기억 속 한 인물과 겹쳐졌다.
그는 내가 있는 칸과 다음 칸을 일곱 번이나 문을 열었다 닫았다 들락 거렸다.
다음 칸에 있는 남자분의 고함이 들렸다.
"추운데 왜 자꾸 문을 열고 들락 거려요? 가만히 있어!" 그 말이 들린 뒤로 그 남자는 더 이상 내가 있는 칸으로 오지 않았다.
이십 년 전, 그는 번듯한 명함을 내밀던 사람이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로 자신을 감싸고, 비싼 외제차를 타며, 사람들 앞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듯 폼을 잡았다.
내가 단체장을 할 때 협회에 스폰을 해 주면서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때 그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허'넘버가 붙은 렌트한 까만 외제차를 타고 다녔다. 주변에서는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 불렀다. 내게도 친근하게 다가왔지만, 그의 말 속에는 진중함이 없었다. 박식함을 가장하려 애썼지만, 세상의 가십 거리를 주로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씀씀이에서도 허세가 많아 속이 텅 비어 보였다.
그와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협회에서 스폰을 받았으니 감사의 뜻으로 내가 대접을 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가장 비싼 회를 주문했다. 일반 횟값의 두 배나 되는 메뉴라 부담이 갔다. 남이 사주는 밥은 당연히 비싼 것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그는 당당했다. 이 사람과 거리를 둬야겠다고 그 때 직감했다.
폼생폼사로 살던 그는 아들이 이성 문제를 일으켜 형사 사건에 휘말렸는데, 주민들 동의서를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회원이 많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젊은 사람이 직장이 잘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도와 주었다.
그는 아들이 구속 되는 것을 막겠다고 월세 보증금 전 재산을 털어 몇 천 만원 변호사비를 댔다고 했다. 그 후로 농담처럼 "서울역 노숙자가 됐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전철에서 본 그의 모습이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아직 젊은데 사지 멀쩡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자립을 못한 체 살고 있었구나!' 전 재산을 털어 감옥행을 면해 준 아들에게 '아버지는 껍데기 였구나!'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내 얼굴을 알아 본 듯 했다. 그래서 두 칸을 오가며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해주길 머뭇거렸던 걸까. 나는 들락거리는 그를 바라만 봤다. 비록 아는 사람이라해도 거지꼴에 염치가 없고 안 좋은 이미지를 남긴 사람에게 아는 체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산다. 누군가는 속이 꽉 찬 채 조용히 살아 가고, 누군가는 빈껍데기처럼 부풀려진 모습으로 허세를 부리며 살아간다.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든 채 허공을 걷다 보면, 결국은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건강할 때 생산적인 일을 찾아 해야 하는데, 다단계를 못 떠나고 집을 경매로 넘기면서도 맹물 먹고 이 쑤시듯 폼생폼사로 허세 부리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주로 주위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다.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주위 사람은 그가 망했다는 것을 아는데, 그럴듯한 폼으로 거짓말을 하며 돈을 빌리려 하고 물건을 사 달라고 염치 없는 부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페르소나 가면을 쓴 체 사는 사람은 주위에 많다.
페르소나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가면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허공을 걷는 듯한 허세, 남의 시선을 의식해 만들어낸 화려한 모습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진짜 얼굴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가면이 벗겨지면 초라한 얼굴로 세상과 마주할 용기도 사라질 것이다.
폼생폼사. 그 허망한 외형 뒤에 감춰진 허술함은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