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원에서는 원래 추석이 지난 뒤에 제사 예법을 가르쳐 주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기수는 달랐다. 예외적으로 교육생들이 추석 전에 일정을 앞당겨, 명절에 곧바로 써먹을 수 있도록 상차림과 절차를 미리 알려주셨다. 음식의 자리를 정하는 법, 절하는 순서, 예법의 자잘한 규칙들이 하나하나 짚어졌다.
“제사 지내는 집이 있습니까?” 교수님이 물으셨을 때, 대답은 거의 “없다”였다. 요즘 세상에서 제사는 잊혀져 가는 풍습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기억 속 집안은 달랐다. 엄마의 손끝에서 전과 고기가 차곡차곡 놓였고, 나는 그 곁에서 흉내처럼 배워왔다. 익숙하다고 여겼지만, 정작 교수님이 물으신 질문에는 하나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나는 늘 보아왔을 뿐,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장남의 아내 곧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제사의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장남이 먼저 절을 하고, 그다음에 맏며느리가 절을 했다. 이어 손자들과 다른 가족, 조문객들이 서열에 따라 절을 이어갔다. 고인이 식사를 한다는 믿음 아래 방 안의 불을 꺼두고, 가족들은 여섯 분 남짓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경건해야 할 시간은 의외로 일상적이었다. 오빠의 아파트 값 이야기가 나오고, 형제들끼리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교수님은 그런 풍경을 들려주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응용해 수업 중에 장난을 쳤다. 자녀 역할을 맡은 수강생을 향해 “너 학원 빠졌지? 선생님이 전화하셨다. 이따 혼날 줄 알아.”라고.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무거웠던 공기는 잠시 풀렸다.
시간이 지나면 맏며느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밥 세 숟가락을 떠 숭늉에 섞는다. 숟가락의 움푹 팬 부분이 동쪽을 향하도록 놓는다. 고인이 숭늉을 드셨다고 믿은 뒤, 밥그릇을 덮는다. 마지막 절을 마치고 지방과 축문을 태우면 제사가 끝난다.
그러나 수업은 예법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수님은 우리가 무심히 쓰던 말들의 속뜻을 짚어주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은 염라대왕의 심판을 거치지 않고 곧장 하늘로 올라, 좋은 곳에 이르기를 바라는 기도라고 했다.
‘며느리’는 메나리, 곧 밥을 나르는 사람에서 나온 말이라며 대체할 언어를 찾아보라는 숙제도 주셨다.
조문과 문상의 차이, 근조와 부의의 구분, ‘싸가지 없다’는 말이 인의예지의 네 가지가 없다는 뜻이라는 사실도 덧붙이셨다.
배우자를 부르는 말에도 깊은 뿌리가 있었다. 여보는 보배 같은 사람, 당신은 내 몸과 같은 사람, 마누라는 마주 보고 누워 있는 사람이라는 뜻.
‘싼 게 비지떡’은 값이 싼 것이 아니라, 과거길에 주모가 떡을 보자기에 싸서 건네주던 데서 비롯된 말이었다.
마지막에는 “천상운집, 검이불누, 화이불치”라는 말을 전해주셨다. 천 가지 길한 기운이 집에 모이기를,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기를, 아름답되 사치하지 않기를.
나는 노트에 그 말을 빽빽이 옮겨 적었다. 제사의 형식을 배우는 자리였지만, 마음에 오래 남은 건 다른 것이었다. 죽은 이를 기리는 법을 배우러 갔다가,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되묻게 된 것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아름답되 사치하지 않으며, 삶을 보배처럼 여길 것. 결국 제사의 예법은 죽은 이를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산 자를 위한 가르침이었다. 나는 그날 배운 말들을 곱씹으며, 내 앞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조용히 되새기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