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지도사가 되려면 일종 면허가 필요했다.
그래서 운전면허 학원에 갔다.
장내기능 시험을 먼저 치르고, 필기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내가 다니는 학원에는 외국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베트남 사람들로 보이는 얼굴들이었고, 같이 시험을 치르러 온 그들의 대화를 언뜻 들어보니 베트남 언어를 쓰고 있었다.
필기 시험 응시 전, 모의고사를 두세번 풀고 시험을 치렀다. 합격 도장을 받고 나오는 길에
재시험 접수 창구 앞에 그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게 보였다.
아, 언어 때문이겠구나.
처음엔 그렇게만 생각했다.
내가 베트남어로 된 시험지를 받았다면
문제를 맞히는 건커녕
질문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어려움은 언어에서만 끝나는 게 아닐 것 같았다.
베트남과 한국은
길을 건너는 방식도,
차를 대하는 태도도,
위험을 피하는 감각도 다르다.
그들이 자기 나라에서 몸으로 익혀온 교통 상식은
한국에서는 오히려 오답이 되는 순간이 많을 것이다.
문제를 몰라서 틀리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세계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배워야 하는 시험.
그건 암기가 아니라
삶의 감각을 통째로 고치는 일에 가깝다.
그들은 왜 한국에 왔을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자기 나라에서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한국에서 받는 임금만큼 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국경 하나를 건너면
같은 노동의 값이 달라진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언어를 배우고,
그래서 이 시험장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시험이 끝난 뒤
외국인들과 함께 셔틀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먹는 게 다르니 냄새도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그 냄새를 이유로
괜히 몸을 움츠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은
‘아, 나에게도 마늘 냄새 난다고 느껴지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냄새는 있었지만
더럽다거나 불쾌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 차이를 나는
그날 분명하게 느꼈다.
예전의 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막연히 무섭거나, 위험하거나,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사람들로
한 덩어리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달랐다.
언어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악덕 사장에게 더 쉽게 부려먹히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하대받는 쪽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셔틀버스를 같이 타고오던 얼굴들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 보였다.
스무 살, 스무 살 초반쯤.
내 나이가 서른아홉이니
조카뻘이었다.
그 앳된 얼굴들이
낯선 나라에서
말도, 제도도, 상식도 다시 배우며
여기까지 와 앉아 있다는 사실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시급이 낮아서 성공을 위해,
호주로, 미국으로, 중동으로 떠난다.
더 나은 조건을 위해
언어를 배우고
제도를 다시 익히는 일을
우리는 ‘도전’이라고 부른다.
같은 이유로 한국에 온 사람들에게만
다른 이름을 붙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날의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여기 온 사람,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
아직은 너무 어려 보이던 사람들.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자기 가족을 지키고,
만약 언젠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면
그곳에서 자기 삶을
단단하게 꾸려갔으면 좋겠다는,
그저 그런 응원의 마음.
시험장은 이미 멀어졌지만
그날 셔틀버스에서 마주쳤던 얼굴들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날 나는
외국인을 본 게 아니라
사람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