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초여름, 동생이 태어나기 한 달을 남겨놓고 우리 가족은 [집]을 잃었다.
당시, 우리집은 신대방역에서도 한 참 떨어진 골목가에 위치한 연립빌라 1층이었다. 아빠는 호텔 연회장 지배인이었고 엄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리고 나는 미운 4살이었다. 처음 태어난 그 때부터 내 고집은 말도 못하게 셌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엄마는 '나중에 사회생활을 잘 할 수는 있을까?' 싶어서 호되게 나를 야단치고 가끔 '사랑의 매' 를 들면서 강하게 훈육을 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의 나는 정말 무난하다 못해서 평범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어른이로 성장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나의 배경을 말하는 이유는 그 시기에 나는 '미운 4살에 고집이 센 아이' 였다는 것이다. 어느 초여름과 다르지 않았던 7월, 지하층에 살고 있는 동갑내기와 나는 나의 방에서 놀고 있었고 엄마들은 브런치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평화로운 정적을 깬 건 우리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유일한 목격자인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사건은 다음과 같다.
나의 아끼던 유모차에 손을 댄 친구에게 나는 몇 번의 경고를 했고 싫다는 의사를 표현했는데 '만지지 마!'라는 나의 경고를 무시한 친구가 억지로 내 유모차를 끌자마자 나는 친구의 귀를 물었고, 친구는 동시에 내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친구의 귀에는 내가 '앙' 문 자국이 남았고, 나는 친구의 손톱에 할퀸 자국이 아직도 얼굴에 남아있다. 사실, 유혈 사태는 나의 쪽에서 일어났는데 억울하게도 이 사건으로 빌라에서 나는 '문제아'가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를 기르고 있는 가족'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친구의 엄마는 '당장 우리 집을 내쫓지 않으면 집값을 떨어뜨리겠다' , '우리 아이의 정신적 피해가 크다!' 라며 당시 윗 층에 살고 있던 주인에게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우리 가족은 일방적으로 집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부랴부랴 신대방역 부근의 월세방을 구했고 그와 동시에 엄마는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그 해 동생은 다행히도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리고 동생이 태어난 지 3년 만에 엄마는 열심히 모아둔 아빠의 월급적금 그리고 은행 대출,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서 신림동 복개천에 위치한 지하방, 방 3개, 아주 작은 마당과 창고가 딸린 단독주택을 샀다. 엄마는 그 집에서 지하방과 방1개를 세를 내어주었고, 아르바이트 소일거리로 그 시기에 방영되었던 '경찰청 사람들' 방송국 관계자들에게 우리집을 재연 스튜디오로 내어주기도 했다. ( 그 시기에 정말 어마어마한 스테프 사람들이 우리집을 들락날락 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
엄마는 종종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말씀하시곤 한다. '너 때문에 집을 샀어! 금쪽같은 내새끼!'
엄마의 나이는 고작 20대 후반이었다. 20대 후반의 만삭 임산부를 내쫓은 집주인 아주머니도 야속하고, 친구의 귀를 화가 난다고 문 나도 미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왜 사람들이 그렇게 집! 집! 집! 하는 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고 했다. 혹시나 내가 똑같은 사고를 치더라도 내 집이 있으면 내쫓겨날 일이 없을거라고 20대의 엄마는 생각했다고 한다. 평생 아빠가 가져다주는 월급 봉투의 기쁨을 맛보면서 살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 시기 내 집을 잃고 나니 대한민국에서는 무조건 [집] 은 있어야 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면서 실제로 엄마는 내 집 마련을 이룬 후 꾸준히 분양, 재개발, 재건축, 상가투자, 경매/공매 등 부동산 투자를 한 번씩은 다 경험했다. 심지어 상가투자는 법원 소송까지 혼자 준비하면서 7년 긴 싸움끝에 모든 보상을 다 받고 승소하기도 했다.
엄마는 항상 나와 동생에게 얘기하곤 했다. '무조건 집은 있어야해' 하지만 생각보다 나와 동생은 엄마가 확고하게 얘기하는 그 [집] 의 중요성을 잘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시기 우리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집] 에 대한 생각이 깨어있는 건 엄마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