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나는 텔레비전에서 마주하는 서른의 커리어우먼 삶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명품 화장품에 굽 높은 하이힐, 늘 근사한 곳만 갈 것 같은 옷차림새. 하지만 정작 서른이 된 현실 속 나의 옷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늘 입는 건 청바지와 맨투맨,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이면 슬랙스와 블라우스 정도. 구두 대신 나에게 1년 내내 고됨을 같이 한 이제는 어떤 색이었는지 잊어버린 휠라 운동화, 대학생 때보다 더 열심히 들고 다니는 노트북 백팩이 전부다.
후드집업은 사계절 내내 나의 데일리룩이다..늘 내 손에 잡히는 편하고 익숙한 것들은 정해져 있는데 언젠가 마주한 옷장에는 더 이상 새로운 옷들이 들어갈 틈도 없이 옷걸이도 부족했다.
마치 옷장은 ‘옷 이제 그만 넣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늘 입는 것들이 있어도 항상 옷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인데, 아이러니하게 옷장에 옷들은 빼곡하다. 신년이 되면 집 청소를 핑계로 온갖 청소를 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해가 밝았고, 나는 시간이 많은 백수다. 고로, 이제야 온전히 본격적인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구실이 생겼다.
옷을 하나하나 꺼내다 보니 도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입었는지 모르고 쟁여둔 옷들이 한가득이었다.
심지어 나에게 미니스커트가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니스커트 대신에 늘 청바지만 고수했다. 심지어 슬랙스는 검은색만 5개가 넘었고, 청바지는 비슷하지만 묘하게 다르게 그렇게 10벌이 넘었다. 보풀이 심하게 일어나 언제 입었는지 모를 파스텔 톤의 스웨터는 나에게 ‘그동안 왜 이렇게 정리를 안 한 거니!?’ 라며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작년부터 살이 빠지기 시작해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옷들인데도 ‘언제 또 살이 찔지 모르니까’라는 막연함으로 구석에 넣어둔 이제는 커진 바지와 옷들도 한가득 이었다.
수선을 해야겠다고 다짐해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수선대신에 먼지만 쌓이게 만든 옷도 한 움큼. 모자도 잘 쓰지 않는 내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샀는지 모를 내 시야를 가리는 털모자. 여행 가서 처음으로 입어본 홀터넥 블라우스, 전 회사 체육대회에서 입고서 3차까지 달렸던 단체복 …
원래의 색도 기억나지 않는 내 운동화하나하나 꺼내어 정리를 하다 보니 그 옷에 대한 추억들 그리고 이제는 희미해진 이야기들까지 새록새록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20리터 쓰레기봉투 2 봉지를 채우고서야 내 옷장은 그제야 숨 쉬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물론, 이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금 사회로 나갈 준비가 된다면 나는 또다시 ‘비운만큼 채워야지, 입을 게 없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쇼핑몰을 뒤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이 이동한 건, 바로 화장대였다. 20대까지 나는 늘 ‘애장’ 하는 화장품이 없었다.
그저 어떤 날은 사람들이 ‘주름관리 해야 해’라고 해서 주름 아이템만 한가득 샀었고, 내 피부타입이 어떤 타입인지 몰라서 버린 쿠션만 열댓 개가 넘었다. 향수는 그저 사치라고 생각해서 없으면 말고 있으면 쓰고 급하면 외출할 때마다 올리브영에 들려서 향수 시향을 했다.
30대가 되니 내 화장대에는 더욱 심플해졌다. 화장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메이크업용 선크림이 나의 화장의 전부이다. 그나마 중요한 미팅 혹은 행사, 이벤트를 위해서 쉐도우와 아이라이너가 있긴 하지만 정말 1년에 손꼽을 만큼 나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니 생얼이든 화장이든 별 차이가 안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화장대는 간소화되었다. 대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스트와 에센스, 로션, 선크림이 전부가 되어 이제는 ‘너 화장품 뭐쓰니?’라는 질문에 내가 애용하는 아이템으로 소개해줄 수 있을 만큼 내 아이템이 갖춰졌다.
대신 샘플용들은 모아두었다가 여행, 출장길에 요기 나게 사용하는데 그마저도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들은 하나씩 정리하기로 했다. 심지어 언제 세탁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색이 바래진 브러시는.. 또다시 내 죄책감을 불러온다.
( 미안, 너를 이렇게 방치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
다음은 냉장고, 다음은 주방 그렇게 하나하나 나의 손길을 거쳐왔던 아이템들을 재정비한다.
[재정비]의 사전적 의미는 ‘다시 정돈하여 갖추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버려야 할 것들도 생겨나고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줘야 할 아이템들도 있다.
그리고 ’ 이건 정말 내 아이템일까?‘ 라며 나를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다. 그렇게 내 취향을 다시금 확인하고 새롭게 발견을 하고 그리고 비우고 정리하고 채운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곳들을 둘러보았을 뿐인데 나는 다이어트를 한 것 마냥 몸이 가벼웠다. 재정비를 했을 뿐인데 기분은 상쾌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
그리고 이상하게 그동안 내가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이제는 아이 엄마가 되어 육아에 빠져있는 대학교 친구, 언제부터 우리의 길이 달라짐을 느끼며 자연스레 멀어진 오래된 동네 친구, 몇 없는 친구 중에서도 늘 나를 응원해 주던 옛 친구가 생각났다. ’잘 지내니?‘라는 카톡을 보냈다. ’ 웬일이야?‘ 대신에 돌아온 답은 ’나 잘 지내, 넌 어떻게 지냈어?‘ 였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친구들이 바뀌고, 멀어지고, 새로워진다. 잊고 지낸 친구와 그동안 서로의 삶은 안녕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중학교 시절 우리가 같이 웃고 떠들던 그때처럼 잠시나마 그때 그랬다고. 추억 여행을 했다.
휴식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재정비를 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도약을 할 수 있으니.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 그 속에서 숨 쉬는 물건 그리고 내가 잊고 지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생각보다 재정비의 시간은 귀찮고 지루하고 힘든 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 마음이 몽글해진다. 그리고 위로가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