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지만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쌀쌀한 보름달이 또 찾아온 날
올해에도 어김없는 추석이 우리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와 살고 있는 우리 집은 자연스레 큰 집이 되었다. 그래서 명절이 찾아오면 우리 집을 중심으로 식구들이 하나둘씩 모인다. 많게는 20명 가까이 모이는데 우리 집이 크지 않은 편이라 거실과 마당에 상을 두 개 차려 식구들이 나눠 앉아 식사를 하곤 한다. 저녁이 되면 나의 방은 다른 식구들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돌보고 식구를 맞이하다 보면 정신은 당연히 없을뿐더러 몸과 마음이 불편해진다. 고등학생시절까진 내 방에 숨어 밖에 잘 나가보지 않고 공부한다는 핑계로 내 방에 숨어 저녁도 따로 먹곤 했다. 그런 내가 두 손 두 발 걷어 붙여가며 식구들을 맞이하기 시작한 건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았다. 식구들이 북적거리는 이 풍경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불화가 많은 집
초등학교 시절엔 명절이 좋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모, 삼촌들은 용돈을 주시고 사촌언니들은 어린 나를 누구보다 잘 놀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10살 때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우리 엄마는 현 씨인데 큰삼촌은 왜 황 씨이고 이모와 두 삼촌들은 또 왜 이 씨인 건지. 엄마는 웃어 넘기기만 하고 설명해주지 않았다. 내가 아직 어려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나 보다. 시간이 지나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3번의 재혼으로 엄마의 5남매는 3개의 성을 가지게 된 것을. 우리 엄마 혼자 현 씨인 것은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낳은 자식은 우리 엄마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걸 알고 난 이후엔 괜히 없던 벽이 생긴 느낌이었다. 우리가 완전한 식구는 못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것이다. 마치 누가 짠 듯 이런 마음이 들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식구들은 만날 때마다 다투기 시작했다. 대부분 할아버지의 이야기였다. 명절의 끝은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떠나고 누군가는 남겨진 집을 치우고 그랬다. 아직도 할머니가 내가 오래 살아 별 못볼꼴을 본다며 얼른 죽어야겠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명절이 싫어졌다. 아니 그냥 식구들이 싫어졌다. 나에게 가족은 우리 4 식구면 충분하다는 마음뿐이었다. 명절만큼 필요 없는 날이 없어졌다.
왜 내 마음을 미워지게 해서
눈치 없는 보름달은 매년 가을을 밝게 비추었고 2017년의 추석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식구들이 거의 오지 않았던 유일한 명절이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에 편히 쉬고 있었으나 할머니의 뒷모습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TV를 보는 건지 벽을 보며 멍을 때리는 건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초점 없는 눈이었다. 매번 명절에 제일 힘은 들어하지만, 본인의 형제와 웃고 떠들던 엄마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알아차렸다. 나에겐 명절이 필요 없지만, 우리 엄마와 할머니에게는 필요한 명절인 것을. 아무리 지지고 볶으며 싸워도 한 집 아래 모여있는 식구들이 필요했다. 엄마의 형제, 할머니의 자식이 아직 나와 오빠보다 이들에게 더 의지되는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에 아무것도 없어 후련하다는 나의 말이 미안해졌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다가올 명절을 내가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적어도 할머니가 살아계실 동안은, 엄마가 나에게 더 기댈 수 있기 전까지는.
불편해도 웃어 보이는 명절입니다.
가족들을 위해 불편한 것쯤이야 참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나씩 명절을 준비한다. 식구들에게 미리 전화를 해 꼭 오라는 말을 남긴다. 그러면 자연스레 잔소리가 따라오긴 하지만 문제없다. 명절 당일엔 조카들이 가지고 놀만한 작은 장난감을 사놓고 마당과 집안을 깨끗이 단장하고 대문을 열어놓은 채 식구들을 기다리고 맞이한다. 식구들이 올 때마다 한껏 밝은 목소리와 웃음으로 반긴다. 오래 보지 않아 어색한 사이일지언정 밝게 반겨주면 식구들도 반가워하듯 서로를 반긴다. 그럼 미리와 있는 식구들 또한 누구 왔어? 하며 다들 나와본다. 이게 반복되면 자연스레 집이 북적거려진다. 그 말은 즉, 나의 몸과 마음의 기가 쫙 빠진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버터야 한다. 그리고 가끔 말이 많아지다 보면 식구들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곤 하지만, 웃고 있는 엄마와 할머니를 보며 웃어넘긴다. 이들이 행복했음 됐다. 그래서 나는 딱 일 년에 두 번 불편하지만 그냥 웃어버린다. 보름달만큼 밝은 우리 엄마와 할머니의 미소를 위해
가족이 도대체 뭘까요, 할아버지
명절의 마무리는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명절 연휴 마지막엔 이천에 위치한 호국원으로 향한다. 호국원에 들어서면 명절이 끝나감을 느낄 수 있다. 할아버지에겐 엄마, 오빠, 나 이렇게 셋만 간다. 명절의 마지막은 우리끼리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다. 나도 다른 식구들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가 미웠다. 이 모든 힘듬의 시작이 할아버지인 것 같아서. “다 할아버지 때문이야”. 사실 창피하게도 돌아가신 분에게 책임을 떠민 것이었다. 그래야 살아있는 식구들까지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미움은 십 년이 흘러서야 미안함이 담긴 뭉특한 마음으로 바뀌었고 이제야 사진 속 할아버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소주잔을 채울때마다 매번 여쭤본다. 가족이 도대체 뭔지. 왜 미우면서 감싸 안으려는 건지. 어떻게 지켜야 하는 건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니 꿈에 나오셔도 대답이 없으셨겠지. 어렵겠지만 그 답은 내가 찾아야겠다. 부디 좋은 의미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