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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a Sep 26. 2015

다 똑같다

해가 뜨는 것도 모른 채 긴 잠을 잔다. 열 한 시쯤 깨어나 침대와 사투를 벌인다. 벌떡 일어나지 못해 밍기적 거리다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두 발로 오늘의 시작을 알린다. 오른쪽 발 먼저 바닥에 내려야 한다. 케냐 친구 어네스트는 늘 내게 말했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왼쪽 발 말고 오른쪽 발을 먼저 디뎌야 그 날 하루가 평안하다고 했다. 뭐든지 잘 믿는 나는 왼쪽 발을 디디려다 말고 이내 오른쪽 발을 쿵 하고 딛는다. 늦은 아침을 먹는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라면을 끓여먹기로 한다. 인터넷이 또 먹통이다. 집에 하루 종일 있을까 하다가 이내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대로 집에 있다가는 우울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증식할지도 모른다.


운전을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 택시를 불러 타고 갈까 하다가 걸어가기로 마음을 바꾼다. 되도록이면 걸어 다니지 말라는 사람들의 경고를 또 한 번 무시하고 노트북을 챙겨 집을 나선다. 20분 정도 걸어가면 이 곳의 나의 강남, 쇼핑몰 Junction이다. 최근 테러로 나름 삼엄하게 쇼핑몰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가드들을 지나야만 비로소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Art cafe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주말마다 혹은 시간이 날 때마다 오는 곳이다. 아트 아이스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이것은 마치 스타벅스의 라떼 프라프치노와 비슷한 맛이다.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즐기며 해가 어둑해 질 때쯤 저녁으로 파스타를 주문한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케냐에서 알게 된 친구들을 부른다. 친구라고 하기엔 한참 어리지만 이 곳에서만큼은 소중한 나의 말벗이다. 그렇게 나까지 3명이 모였다.


어디를 갈까 하다가 그냥 가까운 술집에 가 한 잔씩 하기로 한다. 칵테일 한 잔으로 워밍업을 하고 몇 잔의 데낄라를 마시며 사소한 일상과 막연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금 취기가 오를 때면 각자의 어떤 것들을 이야기 하기 시작하고, 난 그저 듣는다. 언젠가부터 내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내 얘기라고 해 봤자 어차피 결국 아무런 진전 없는 당신의 이야기만 또 늘어놓을 게 뻔하니까. 나보다 어린 그들의 삶에 대한 고군분투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또 추상적인 감정들에 빠져든다. 아,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자리가 끝날 때쯤 택시를 불러 집으로 한 명 한 명 데려다 주고, 마지막은 내 차례다. 늘 태워주는 택시기사 John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가격을 흥정한다. 그는 Helena만 해주는 특별 할인이라면서 깎아주는 냥 생색을 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깎아주는 것이 아닌 그저 부풀려 받지 않는 금액이라는 걸.


술이 조금 아쉬워진 나는 집에 들어가 와인 한 잔을 마신다. 기타를 집어 들고는 치지도 못하는 음들을 꺼이꺼이 누르며 혼자 노래를 지어 부른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다를 것 없는 주말이다. 아프리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의 하루도, 출퇴근 시간의 교통체증도, 그들만의 불금도, 회사원들의 Face book도.

나는 그에게서 너를 보고, 그녀에게서 너를 본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의 사람들을 마주하고, 그 곳에서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낸다. 피하고 싶어 달려왔는데 결국은 다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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