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는 연인 사이도 아닌데 전화 통화를 시작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었고, 뭐가 그렇게 즐겁고 할 말이 많았었는지 특별한 약속이 있지 않은 이상 늘 붙어 다녔다. 그는 그녀에게 감성을, 그녀는 그에게 이성을, 서로 알아가고 존중해가며 나누었던 대화들, 하지 말라는 것 좀 하지 말자며 싸웠던 강남역의 한 술집, 검은 눈물을 뚝뚝 흘렸던 새벽의 압구정, 그녀의 친구들 속에서 함께 축하해주었던 그녀의 생일까지.
그녀가 그를 만날 때 가끔 그녀의 심장이 뛰는 이유는 술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녀가 그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던 이유는 그와 참 잘 맞는친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없으면 모든 시간들이 의미 없어지는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녀에게 넌 그를 좋아하고 있다 라고 얘기해줘도 그녀는 강력히 부인했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는그냥 친구일 뿐이야."
언젠가부터 꽃을 보면 마음이 울렁이기 시작했고, 이유 없이 혼자 설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끝엔 항상 그가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우정일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술을 핑계 삼아 어쩐지 참 든든해 보였던 그의 어깨에 모른 척 기댔었던 어느 토요일들과, 불쑥 잡고 싶어지던 그의 손, 자려 누운 침대에서 자꾸만 감질나게 생각나던 그의 눈빛 같은 건 그저 그녀가 외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그녀와 그가 함께 자주 만났던 친구와 그가 연인이 되었다. 배신감이 드는 이유는 그저 그들이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아서 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에서 오는 서운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는 그들과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들의 행복한 웃음이나 자신의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사랑스러운 눈빛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고, 또 나름 오래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괜히 외로워지고, 자꾸만 심술이 차오르던 날들에 그와 그의 여자를 함께 마주쳐버린 순간, 그녀는 비로소 그녀가 그를 좋아했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연락하고 싶어 죽겠는 그 손가락을 참아내는 일, 보고 싶어 죽겠는 그 마음을 참아내는 일, 입 밖으로 그의 이름을 한마디도 내뱉지 않는 일, 그 어떤 사소한 장면에라도 그를 그려 넣지 않는 일들을 그녀가 참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수도 없이 내세웠던 그와의 우정, 그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감추고 우정으로 포장했던 그녀의 마음이 깊어졌는지는 그 뒤로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마음을 봉인한 채 마음 속 깊은 상자에 가둔 듯 했고, 그와의 우정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한 것 같았다.
오랜만에 그와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아마도 숨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그 감정들이 저절로 깨어나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연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못된 마음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와 헤어질 때 그녀는 눈물을 꾹 참아야 했다. 보고 싶었던 그의 눈을 똑바로, 또 오래 보지도 못했는데 이제 또 보고 싶어 해야 할 날들이 너무나도 까마득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유 모를 눈물이었다.
그에게도 그녀가 사랑이었던 적이 한번쯤은 있었는지,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르면 그녀를 대신해 물어야겠다.어떤 대답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녀에게 전해주지 못할 말이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