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나온 건 한국이 아니었다. 내가 정말 떠나온 건 한국에 있는 나의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주 많이 사랑 받던 사람이라는 것을 곳곳에 몸을 틀고 있던 외로움들이 증명했다. 할 수 있는 연애도 없었다. 잠시 잠깐의 한눈 팔기 식 연애는 싫었을 뿐더러 내 세게는 또 온통 당신이었기에. 타지에서 나눌 우정 또한 녹록치 않았다. 그 누구를 만나도 아무렴 내 친구만 할까.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은 기분에 상대방에게 더 조심스러워지고, 멀어질까 두려워 눈치보는 일이 잦아졌다.
자꾸만 나를 잊어가는 듯한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인터넷을 원망했다. 항상 내가 있던 자리에서 지금은 있지 않은 나를 그 자리에 메워가는 내가 싫었고, 더 이상 나의 외로움도, 힘듦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미웠지만 왜 내 말을 이제는 들어주지 않는 거냐며 따질 수 조차 없는 내가 싫었다. SNS를 끊었다. 그저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 프로필 사진만 계속 바꿔댔다. 그런 내 감정이 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 보고 싶은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했고, 아무도 보고 싶지 않으면서 그 누구라도 보고 싶었다. 여행은 내게 애정결핍을 선물했다.
흔히들 애정결핍을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에게 생기는 증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건 틀렸다. 사랑을 넘치게 받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애정들을 충족 받지 못할 때 오는 증상, 말 그대로 애정이 결핍 된 상태, 사랑 받았음의 증거, 그게 애정결핍이다.
내가 여기서 완벽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더라면 내가 그들을 잊을 수도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도 넘칠 만큼 사랑을 받았다면, 너무나도 나의 하루가 완벽했다면, 나라는 못된 사람은 아마 그들이 꽤나 귀찮게 느껴졌을 거다. 나는 원체 연락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전화를 한 번에 받는 날이면 사람들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내게 투덜거리기도 했었고, 메세지는 늘 몰아서 봤기에 쓴소리 듣는 건 기본이었다. 그랬던 나는 지금 그저 되돌려 받고 있는 중일 뿐인 거다. 내 메세지에 당장 대답이 없다고 해서, 내가 없는 한국에서 그들이 나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잊어간다고 하기엔 너무나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애정결핍이라는 단어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 같아 불쌍함과 동정심을 유발하며 보통 어두움에 비유되곤 하지만, 사실 애정결핍은 참 아름다운 단어다. 언제나 사랑만 받고 사는 삶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크건, 작건, 길건, 짧건 간에 애정결핍의 증상들을 마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갑자기 내 친구들에게 서운한 것이 늘어간다면,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눈치보게 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면, 당신의 증상들을, 애정결핍을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추하고 못생긴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는 아름다운 증거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