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밤은 우리의 낮보다 성실했다
자연사 박물관에 경비원으로 취직해 첫 야간근무를 시작한 남자, 래리. 전임자로부터 '아무것도 내보내지 말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듣긴 하지만, 별문제 없이 박물관의 이곳저곳을 순찰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앞에는 기상천외한 장면이 펼쳐지고 마는데~ 뚜둥!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박물관 운영시간이 끝난 후,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상상을 스펙터클 하게 녹여냈다. 이 영화를 보았을 당시, 운영시간이 끝나 문을 닫은 건물을 보며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나의 상상은 곧 현실이 됐다. (그렇다! 박물관의 그 경비원이 바로 월터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나는 집 근처 스타필드에서 쇼핑몰 영업이 끝난 후, 비로소 시작되는 일을 하게 된다. 사건의 전말을 이랬다. 구직급여가 끝나고 본업으로 돌아갈 생각은 차마 못한 채, 알바몬 어플을 다운받아 매일 같이 들락거렸다. 쉬는 동안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했기에 호기롭게 카페 알바를 여러 군데 지원했는데, 나이가 많아서 인지 경력이 없어서인지 구직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눈에 띈 시급 15,000원의 꿀알바직! 바로 의류브랜드 zara의 야간 물류알바였다. 왜였을까?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지원버튼을 눌렀다. 한 번도 야간 물류 알바를 해본 적도 없기에 정확히 어떤일을 하는지도 모른채 말이다. 당시 나는 그냥 노동을 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보다 나의 1차원적 쓰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흔히 말하는 무념무상 단순 업무! 방송작가 일에 약간의 번아웃이 왔던 내게, 그것이 몹시 필요했다.
전화로 알바 합격 통보를 받았고 며칠 후, 밤 9시 30분 쇼핑몰 외부 주차장으로 향했다. 집 근처라 낮이고 밤이고 자주 찾았던 곳인데, 그날따라 어둠 속에서 거대하게 반짝이는 쇼핑몰의 외관이 생경했다. 작업반장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분이 이름을 호명하며 작업자 인원체크를 했고, 서로가 어색하게 서로 눈인사를 나눴다. 친구끼리 온 젊은 친구들도 있었고 벌써 직장동료처럼 친해진 사람들도 보였다. 난 무슨 용기로 이 밤에 혼자 이곳에 왔을까, 잠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봤다. 작업반장을 따라 쪼르르 쇼핑몰의 비밀 통로로 향했다. 여전히 훤하게 불을 켜놓은 쇼핑몰 내부에는 영업시간 내내 근무하던 직원들이 매장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번듯한 대문을 지나쳐 구석진 문을 열고 들어서니 보완요원이 지키고 있는 관문이 보인다. 신분증을 저당 잡히고 번호가 적힌 출입증을 받는다. 다시 구불구불 직원용 통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간다. 마지막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드디어 쇼핑몰 내부로 입성한다.
나는 무엇을 찾으러 이곳에 온 걸까?
영업시간이 끝나면 쇼핑몰 내에 모든 매장도 불을 끄고 끝을 맞이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 늦은 밤, 쇼핑몰 안은 손님만 없을 뿐 여전히 활기찼다. 새 시즌에 맞게 디스플레이를 손 보는 매장 직원들. 바닥 청소용 기계를 타고 돌아다니며 바닥을 광을 내는 미화원 어르신. 손걸레를 가지고 곳곳을 닦아내시는 여사님들. 무전기를 들고 다니며 셔터가 내려온 매장 안팎을 점검하는 보완요원들. 수화물 전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박스더미들과 그것들을 나르는 사람들. 늦은 밤, 쇼핑몰에서는 모두가 이렇게 각자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고 있었다.
작업시간은 밤 10시부터 새벽 2시. 물량이 많으면 잔업이 있다고 했다. 내가 배정받은 파트는 '키즈'였다. 아이 옷을 자주 사던 매장이라 약간 신이 나기도 했다. 이번 가을 신상은 어떤 게 나오려나 미리 보고 찜해놔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약 4시간 후, 나는 다시는 이곳에서 아이의 옷을 사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업무는 그야말로 단순했다. 남성 알바생들이 하차시켜 매장에 던져놓은 신상 의류 박스를 개봉해 종류별로 분류, 포장을 벗기고 잘 개어 사이즈별로 정리하면 된다. 옷을 꺼낸 박스를 깔고 앉아 장갑을 낀 손으로 얇은 비닐 포장을 벗기기 시작한다. 한 조에 4~5명의 인원이 배치됐는데, 모두 여성이지만 다들 과묵하다. 누가 수다를 금지한 건 아닌데, 그저 묵묵히 포장을 뜯고 옷을 가지런히 개고, 지정된 장소로 옮겨 놓는다. 나도 그들처럼 묵묵히 내 앞에 놓인 노동에 집중했다. 늦은 밤, 시간은 정직한 속도로 흘러갔다.
2시간이 지나자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물도 마시고 허리도 펴고 화장실도 다녀오는 시간이라고 했다. 앉아있을 땐 몰랐는데 일어서니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잠시라도 이곳을 벗어나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매장 밖으로 나갔다. 평소 쇼핑을 하러 왔을 때 잠시 앉아서 쉬던 긴 벤치형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곳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혹시 잠들 수도 있으니 10분 후에 알람도 맞춰놓았다. 그날, 영업이 끝난 쇼핑몰 벤치에 대자로 누워 높디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느낀 “밤 12시의 피곤함”은 오랫동안 기억 될 것 같다.
다시 작업이 시작되고, 1시간 정도 지나자 한계가 왔다. 하지만 다들 별 불평 없이 묵묵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 누가 끌고 온 것도 아니고 내 발로 왔는데 잘 마무리해 보자...’ 이런 생각으로 버티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오늘 알바비가 그러니까 얼마야? 시급 15,000원에 4시간이면 6만 원. 3.3% 세금 떼면 5만 8천 얼마...' 이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내가 접고 있는 아동용 니트의 가격택을 보게 됐다. 59,000원. 에잉? 내가 이렇게 밤새 새우등이 돼 가며 옷을 접어도 이 아이 옷 한 장 못 산단 말이야? 내 하찮은 노동력이 문제인 거야, 인플레이션이 문제인 거야? 아님 이것은 글로벌 기업의 횡포인가? 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수많은 질문 끝에 내가 찾던 정답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그동안 돈을 차암, 허투루 쓰고 있었구나.
급 반성의 시간이 찾아왔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때론 돈을 많이 벌기도 했다. 물론 일한 만큼 버는 돈이다. 그러나 그렇게 번 돈의 가치를 스스로 폄하하고 지냈던 게 분명하다. 돈을 많이 벌 수록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 갈급함을 소비로 풀었다. 바쁜 와중에 짬이 나면 쇼핑을 했고, 늘 사야 하는 물건 목록이 화수분처럼 샘솟았다. 폰으로, pc로, tv홈쇼핑으로, 미팅장소 근처 쇼핑할만한 곳에서… 소비는 늘 계속됐다. 그중엔 필요한 것도 있었겠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8할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미니멀리즘에 빠져들어 소비의 광기는 어느 정도 진화됐지만, 2년간 유지하던 최소주의 텐션도 차차 느슨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나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선물처럼 찾아온 것이다. 아니 찾아왔다기 보단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다.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진짜 노동과 소비의 가치 말이다.
현재는 예전만큼 돈을 많이 벌지 않고 있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에서 소비를 줄인 건 아니다. 이제는 물건 가격 앞에서 쇼핑몰 야간 알바의 고단함을 떠올린다. 자연히 소비에 신중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시로 드나들던 zara 매장엔 발길을 딱 끊었다. 물론 언제고 다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부정적인 심정을 해소하기 위한 소비를 하진 않을 것 같다. 아직도 그날 밤, 문 닫힌 쇼핑몰 안을 가득 채우던 여러 사람들의 성실한 인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내 삶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글루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