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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사공이 Oct 06. 2023

하얀 셔츠 같은 말

서로의 가슴에 떡볶이 국물 같은 상처를 내지 말자!

 식당에 가면 개인용 앞치마를 구비해 놓은 곳이 많다. 흰옷을 입고 온 손님에겐 묻지도 않고 앞치마를 가져다주시기도 한다. 소주 브랜드가 적혀있는 앞치마, 부직포로 된 일회용 앞치마. 때론 그 앞치마를 목에 걸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꼭 남의 이야기도 아니다. 나도 가끔 식당 계산대 앞에서 부랴부랴 앞치마를 벗어 놓고 나온 적도 많다. 이렇게 정신이 없으니, 앞치마마저 안 했더라면 나의 옷은 거의 잭슨 폴록의 작품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물감을 흩뿌려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나는 김칫국물을 흩뿌려 칠푼이의 경지에 오를 뿐이다.) 미스터리하게도 흰옷을 입고 나간 날엔 어김없이 빨간 양념이 앞치마의 영역을 피해 톡톡 튀어 있다. 빨간 음식을 애써 피해보아도 흰옷 착장데이에는 기필코 커피 한 방울이라도 흘러 있었다. 아, 조심성도 없지. 자책의 탄식도 지겨워 더 이상 내뱉지 않는다. 미간을 찌푸리고 젖은 행주나 물티슈로 쓱쓱 얼룩을 닦아 낼 뿐이다.


남편은 음식을 먹을 때 좀처럼 흘리는 법이 없다. 연애 시절, 퇴근 후 정장 차림으로 만나 식사를 한 적이 많은데, 흰 셔츠에 김칫국물 한 번 튄 적이 없다. 참 깔끔한 사람이구나 감탄과 함께 한 번 더 반하게 되었다. 칠칠치 못한 나로선 충분한 심쿵 포인트였다.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내 옷에만 양념이 튀는 게 억울하고 놀라워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흰옷에 티끌 하나 안 묻히고 먹을 수 있냐고, 나는 이렇게나 잔뜩 튀었는데.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조심해서 먹어야지”


그리고 보니 그는 식사 내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넥타이를 누르며 앞섶을 한 손으로 공손히 가리기도 했고, 후루룩 소리를 내는 법도 없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그저 맛있게 먹는데 바빴다. 먹을 땐 음식이 튀는지도 모르다가 나중에 얼룩을 발견하고 짜증을 내는 편이었다. 그 후로 나의 정신없는 식사 태도는 조금 나아졌다. 하얀 셔츠를 입은 날에는 더욱 조심한다. 천천히 곱씹으니, 음식의 맛도 더 좋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처음으로 다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주로 30~60대의 여성들로 구성되어 시끌벅적했다. 옆에 앉은 분이 비빔냉면을 주문했다. 당연하듯 앞치마를 챙겨주려는 사람들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한다. ‘괜찮습니다.’ 나도 속으로 어떻게 비빔냉면을 앞치마 없이 ‘괜찮게’ 먹을 수 있다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양념이 튀면 어쩌냐며 연거푸 권하지만, 그녀는 끝내 앞치마를 하지 않고 식사를 마친다. 평소 차분한 말씨와 행동이 눈에 띄던 분이었다. 역시나 식사 내내 그녀의 움직임은 찬찬하고 우아했다. 물론 셔츠에는 얼룩 한 점 허락하지 않았다. 참 단정한 식사 태도다.

모든 일은 하얀 셔츠를 입고 식사를 하듯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가끔 하얀 셔츠 같은 어떤 장치가 없으면 '조심성'이라는 중요한 옵션을 빠뜨린다. 마음이 급해서, 편해서, 늘 하던 거니까.  베테랑 운전자도 조심하지 않으면 차를 긁게 된다. 산책을 하다가도 대충 걷다가 발을 삐끗한다.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식탁 모서리에 허벅지를 부딪쳐 자주 멍이 든다. (안타깝지만 모두 내 얘기다)


말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존댓말은 하얀 셔츠 같은 존재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과 지금까지 존댓말을 주고받는 이유도 다 조심하기 위해서다. 물론 유머러스함과 경제적 언어생활을 위해 반말도 조금씩 한다. 그러나 대화와 톡의 80%는 존댓말이다. 아무리 바빠도 ‘o o’ 두 버튼을 누를 시간에 ‘네’를 적으면 된다. 서로의 가슴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떡볶이 국물 같은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말을 조심해서 내뱉는다. 살다 보면 언쟁이 일 때도 있지만 존댓말 덕분에 그 후 일상은 덜 심각할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스트레스가 나를 찾아올 때, 나는 하얀 셔츠를 단정히 차려입듯 일상을 조심히 살핀다.

나의 부주의를 자각하고 신중한 태도가 일상이 되면,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내 삶의 모든 것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글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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