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나아가기 위한 선언서
한동안 글쓰기를 멈췄었다. 바빴고, 바빠서, 바쁜 것 같아서. 핑계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쓰지 않은 진짜 이유를. 약속한 마감 날짜도 없고, 협의된 페이도 없으며, 글을 안 쓴다고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 글을 쓰겠다는 야무진 꿈을 일기장 모퉁이에만 적어둔 채 글쓰기를 외면해 온 것이다. 공동저서로 책이 나온다는 목표가 있을 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신나게 자판을 두드려 댔고, 늦은 밤까지 퇴고를 거듭했다. 책이 나온 후, 주변인들의 반짝 축하 세례가 끝나가자 대나무처럼 빳빳하게 자라나던 글쓰기에 대한 의욕은 어느새 밤이슬 맞는 지푸라기처럼 힘 없이 눅눅해졌다. 책을 쓰는 동안에는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들이 반짝이는 글감이 되었다면 책이 나온 이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둔갑했다.
고백하건대, 업으로든 취미로든 글쓰기를 멈추고 나니 좀 단순하게 살게 된 것 같아 오히려 편했다. 일상의 어떤 마주침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를 쓰고, 또 그 속에서 깨닫고 더 나은 내가 되려 노력해 왔던 많은 날들. 그걸 안 하니, 수고스럽지 않게 하루하루가 그냥 흘러갔다. 정성 없는 대화와 멍하고 소비적인 시간을 보냈다. 원고작업은 물론이고, 브런치 발행이나 SNS 피드조차 전무한 몇 달의 시간을 보냈다. 편했지만 공허했다.
완전히 멈추고 나니 비로소 후회감이 밀려왔다.
타자기 위에서 놀던 손에 제동이 한 번 걸리고 나니 다시 출발하기도 쉽지 않았다. 글 쓰는 재주도 일종의 손기술이었나 보다. 손이 굳으니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다. 결혼 전 치과에서 일하던 친구가 다시 복직을 하고 싶어도 손이 굳어서 어렵다는 말했을 때 친구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손기술을 한 번 놓으면 다시 이전의 경지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고, 다시 시작하려면 새로 배우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여러 업계의 정설. 머리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손도 굳어가는 걸 느끼자 후회감이 밀려왔다. 누가 돈을 주지 않아도 일기라도 쓸걸. 망상에 가까운 소설이지만 일단 아무렇게나 써볼걸. 살면서 단 한 번도 하얀 백지가 두려운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홀로 껌뻑이는 커서를 보고 있으면 살짝 긴장감이 든다. 이제는 진짜 다시 시작할 때가 됐나 보다. 누가 궁금해하지 않더라도, 재촉하지 않더라도 멈추지 말고 내 글을 써야겠다. 당장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끝엔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글루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