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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Sep 18. 2017

베케트의 수수께끼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中



 1953년에 발표되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사람이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희곡이다.

"가자."
"갈 순 없어."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책에서 몇 번이나 이 같은 대화가 나왔을까. 두 남자의 하루 일과라고는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황량한 시골길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지나가는 나그네와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모두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수단일 뿐 큰 의미를 가지는 행동은 아니다. 물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대사들 속에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였던 경우도 있지만, 이 희곡의 핵심은 오로지 기다림이다.

 디디(블라디미르)와 고고(에스트라공)가 알 수 없는 고도을 기다리는 것처럼 삶은 과연 무언가를 기다리는 순간의 연속일까? 맞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처럼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희망을 바라보며 산다. 오늘보다 행복한 내일을 가져다줄 어떤 것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종류는 모두가 달라도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씩 품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희망인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는 삶을 비추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태도는 공감하기 힘들다. 고고와 디디가 보이는 모습은 극히 수동적이다. 수십 년을 기약 없이 제자리를 지킬 바에야 직접 고도를 찾아 나설 만도 한데, 그들은 그저 오랜 습관처럼 황량한 거리를 맴돌 뿐이다. 우리는 조금 더  주체적으로 존재하고 싶은데, 마치 두 남자는 실존을 포기한 것만 같다. 둘에게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에스트라공 : 이리 오기로 돼 있는데

블라디미르 : 딱히 오겠다고 말한 건 아니잖아

에스트라공 : 만일 안 온다면?

블라디미르 : 내일 다시 와야지.

에스트라공 : 그리고 또 모레도.

블라디미르 : 그래야겠지.

에스트라공 : 그 뒤에도 죽.

블라디미르 : 결국.......

에스트라공 : 그자가 올 때까지.



  고도는 사실 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만한 일이라면 그들은 왜 고도를 먼저 찾아 나서지 않는가? 매일 같이 고도가 오늘은 못 왔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소년에게 길을 물어 나설 수도 있다. 소년이 응하지 않는다면 몰래 따라가는 방법도 있다. 물론 우리는 독자의 입장에서 고도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지만 적어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 존재를 확실하게 믿고 있으니 희망을 찾아 나서기를 망설일 이유가 없는데도 그들은 그저 먼저 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둘에게 '고도'는 언제 올 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만나게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며 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것이 있을까?

 물론 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언제 올지 알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은 죽음이다. 고도가 디디와 고고에게 희망적인 존재이므로 죽음과는 다른 것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들은 마지막에 자살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벨트가 힘이 없어 목을 메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할 뿐 죽는 것을 망설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고도가 오지 않으니 죽음을 앞당기려 했다.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 희곡은 "피할 수 없는 죽음(=고도)만을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두 남자"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고도를 기다리며>가 전 세계의 극장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연극에 대한 기존의 틀을 완전히 깨부수면서 과연 '고도'가 무엇인가 하는 수수께끼로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배경지식 없이 부조리극이 어떻고 말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 함께 고도를 기다린 사람은 누구나 "도대체 고도가 뭐야?"라는 수수께끼를 품을 수 있다.

 이 희곡의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에게 "그걸 알면 내가 책에 썼을 거요."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고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고도가 죽음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다소 엉뚱하게 들리는 결론을 내리게 되더라도 한 번은 생각해볼 만하다. 문학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스스로 만의 답을 찾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는 것이니까.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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