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희 May 23. 2018

면접날, 나는 바다에 갔다

용기와 도망 사이의 어딘가

 봄이 절정을 맞이 했을 때쯤이었다. 여유시간은 대부분 여행기 집필을 마무리하는데 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대학도 마쳤는데 이렇게 취업을 외면하고 살아도 되나'라는 불안함과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두 곳의 공채에 지원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글을 써오던 시기라 여행기 한 편 분량이 채 되지 않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커다란 노력도, 충분한 고민도 없이 취업 전선에 슬쩍 한 발을 담갔다.


 몇 주가 지나고 일하는 카페가 유난히도 조용했던 어느 오후에, 문득 서울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1차 서류전형에 합격했으니 다음 주에 면접을 보러 서울의 본사에 오라는 것이었다. 서류를 넣었다는 사실 조차 잊고 살던 나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합격 통보에도 꽤나 가뿐하게 알겠노라 대답했다. 대단할 것도 없는 내 '스펙'과 자기소개서를 보고 면접 기회를 주겠다 하니 뭔가 인정받은 듯한 기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처음 떠오른 걱정은 어이없게도 '합격하면 어쩌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서는 의문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당장 취업이 하고 싶었어?', '불안정해도 자유로운 지금 생활이 좋았던 것 아니야?', 그리고 '정말로 그 일이 하고 싶었어?'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것도 아닌 마당에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격인지도 모르지만, 내 기준으로는 서류에 지원하기 전에 진작에 마음을 정했어야 했던 질문들이다. 나름의 잣대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공채 시즌이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지원한 서류가 '덜컥' 합격을 해버리니 다시 내면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리라.


 며칠 뒤, 면접을 위해 한 벌 있는 정장을 세탁소에 맡기고 깔끔한 구두를 하나 새로 샀다. 그래도 이름 있는 기업의 면접 기회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고, 잘만 풀리면 그 어렵다는 취업도 단 번에 패스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정작 면접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한 번 읽어보지도 않고 일주일을 보냈다. 주말엔 깔끔한 면접 복장을 갖추기 위한 쇼핑을 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마음에서 오는 공백은 예쁜 넥타이를 사는 것으로는 채울 수 없었다.


 단지 좋은 경험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에 없는 면접을 보러 가고 싶지는 않다. 아무런 준비도 안 한 채 요행을 바라는 것은 더욱 싫다. 혼자서 가기로 했다가, 안 가기로 했다가 하면서 자꾸만 고민이 반복되니 점점 스트레스가 커졌다. 면접날이 거의 다 되어서야 이제는 정말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단순히 이번 면접을 가느냐 안 가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으므로 꽤 시간이 필요했다.


 가만히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그 회사에 해당 직무로 입사한 내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이름 있는 기업, 안정적인 직장, 아마 성공적인 취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긍정적인 결과를 그려봐도 가슴이 뛰질 않는다.



가슴이 뛰질 않는다.

 

 

 반면에 좋아하는 일들로 그려본 미래는 아무리 고단한 상황을 대입해도 가슴이 뛴다. 그래서 면접을 포기했다. 전화로 불참 의사를 알렸다. 조금이라도 가슴 뛰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서. 너무 어린 생각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가슴 뛰는 일을 좇는 게 철없는 짓이라면 아직은 아이처럼 살고 싶다.


 그래도 이번에 면접 기회를 한 번 받아 본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를 다시 실감 나게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합격하면 어쩌나 하는 김칫국까지 마셔보니 나에게 직업은 싫어도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니 조금 더 천천히, 그러나 무엇보다 꾸준함으로, 그렇게 살아야겠다.




 면접이 예정되어있던 당일, 빗소리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말끔히 씻고 잘 다려놓은 정장을 꺼내 입는다. 새로 산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밖으로 나오니 그새 비가 멎어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동해선 열차에 오른다. 오늘은 가야 할 곳이 있다.



 면접날, 나는 바다를 보러 왔다.

 

도망자의 바다구경


 "당신 앞에 여러 갈래 길이 펼쳐지는데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를 때, 무턱대고 아무 길이나 택하지 마라. 차분히 앉아라. 그리고 기다려라.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꼼짝하지 마라. 입을 다물고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러다가 가슴이 당신에게 말할 때, 그때 일어나 가슴이 이끄는 길로 가라."      


 - 수잔나 타마로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서 인용)

작가의 이전글 불안한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