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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Dec 26. 2018

여행 중의 인연, 나의 가야 할 길

자유로이 걷되 휩쓸리지는 않아야 했다


자유로이 걷되 휩쓸리지는 않아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첫 번째 숙소에서의 마지막 아침, 눈을 뜨기도 전에 밖에서 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약에 문제가 있었는지 중간에 하루를 다른 숙소에서 묶게 된 그는, 아침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이곳으로 돌아왔다. 독특한 러시아 라면을 몇 개 얻었으니 아침을 함께하자고 전날 밤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단지 나 때문은 아니었다. 건너편 여성용 도미토리에서는 유이가 루스키섬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찬과 유이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들이다. 둘은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알았는데 유이는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수준이었으므로 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어느 밤에 숙소의 휴게실에서 둘을 다시 만났을 때, 루스키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둘은 내가 이미 섬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곳이 어떠한가부터 가는 방법 등에 대해 세세히 물어왔다. 각자 홀로 여행을 떠나왔다가 인연이 닿은 두 중국인 남녀는 며칠 사이에 퍽 가까운 사이가 된 것처럼 보였는데, 여행지에서 도시 외곽의 섬을 다녀오는 일은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섬의 풍경을 사진으로 보여줄 무렵, 유이는 버스를 타야 하는 곳부터 루스키섬의 주요 포인트를 지도에 찍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하니 그녀는 카카오톡 아이디를 물었다. 당시에는 중국인 여행자들이 왜 그토록 자연스럽게 카카오톡 앱을 이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둘 다 한국어를 한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의 직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식 컵라면을 먹은 그 아침, 찬과 유이와 함께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숙소를 옮기는 날이었는데, 늦잠을 잔 내가 짐을 싸고 나올 때까지 둘은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신한촌 기념비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고, 둘은 루스키섬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혁명광장 부근으로 내려가야 했다.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어 그들을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고 이별의 시간이라 생각하여 사진까지 한 장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른 여행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다음, 나의 가야 할 길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이란 혼자 하는 여행의 필연적인 쓸쓸함이자 묘미였다.

 

 여느 때처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래도록 혼자 걸었던 그 날 오후, 한 해안가에서 노을을 감상하던 나는 한 카카오톡 채팅방에 초대되었다. 루스키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유이와 찬이 함께 저녁을 먹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왔다. 아주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는데 여럿이 가면 다양하게 먹을 수도 있고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마침 저녁때가 되었고 마땅히 갈 곳도 정해두지 않았기에 알겠노라 대답했다. 곧 찬은 식당의 위치를 보내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후로 사람들과 함께 식당에 간 것이 처음인 데다가 음식도 맛있어서 썩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찬은 그날 밤 비행기로 떠나야 했고 유이는 하루가 남아있었다. 찬은 마지막으로 함께 야경이 예쁜 전망대로 산책을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는데, 유이는 아직 그곳에 올라본 적이 없어서 이미 그러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나는 여행 중에는 언제나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이 걷고 싶다. 하지만 여행 중의 인연으로 혼자인 고독을 달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야간 산책을 가자는 그들을 배웅했다. 그 자리에서 곧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둘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언젠가 찬은 나에게 첫인상으로는 벽을 쌓고 지내는 사람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내가 그의 마지막 산책 제안을 거절하고 작별인사를 건넬 때 그는 또다시 벽을 느꼈을까. 두 사람에게 내가 기약 없는 헤어짐을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 냉혈한으로 보이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과연 내가 그리던 여행은 어느 순간에 가장 가까웠을까. 홀로 걷는 낯선 도시의 밤거리일까, 처음으로 함께 식사할 친구들이 생겼던 짧은 저녁이었을까, 시끌벅적했던 게스트 하우스의 밤이었을까.

 

 여행의 가치란 그 어느 곳에도 있었기에, 나는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함께하는 흥취에 빠지는 시간은 무게가 몹시 나가서 조금만 넘쳐나도 한쪽으로 추가 기울어 버린다.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혼자가 되면 고독이 찾아올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두려움으로 갈 길을 정하는 것은 원했던 여행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걷되 나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로에서 휩쓸리듯 이탈하지는 않아야 했다. 너무 오랜 시간 타인과 함께인 즐거움에 나를 맡겨 두기에는 혼자 떠나온 여행의 시간이 부족하다.


노을이 지는 시간, 홀로 걷던 거리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던 한 사람이 떠날 때, 혼자 하는 여행이 처음이라던 유이는 정말 이렇게 친구를 사귈 수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누군가 먼저 떠나간다는 사실이 무척 아쉽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 진심이 비쳤다. 나는 언제나 그 순간이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가치 중 하나를 발견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마음을 꾹 눌러두고 꿋꿋이 각자의 길을 가는 그 여행의 과정이 우리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낙화’의 한 구절처럼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남으로써 더 소중해지는 인연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아쉬움과 미련 속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모종의 유혹에 휩쓸려 나의 길을 덜컥 선택하지 않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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