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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Oct 28. 2017

나 홀로 기차여행

 여행의 방식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이 있다. 다만 내가 느낀  첫 번째 '여행'은 첫 번째 '떠남'은 아니다. 여행이라 함은 넓은 의미로는 살아가는 모든 날들을 포함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조금 그 의미를 좁혀서 생각해보면  여행은 '놀러 가는 것' 혹은 '휴가'등의 개념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살면서 처음 다녀온 여행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바다로 산으로 친구들과 떠났던 순간들이 아니라 홀로 기차를 타고 떠났던 스물셋의 여름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이것은 그 첫 여행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스물세 번째  여름이 시작되려할 때 즈음,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속칭 '수박 알바'로 불리는 여름 시즌 파트타임이었다. 아르바이트지만 주 5일을 꽉 채우는 스케줄이라 생활비를 빼고도 돈이 꽤 남아 저축을 했다. 전역하자마자 일을 구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군 복무는 항상 전역을 기다리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정말로 사회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기가 되자 혼자 여행하면서 전국을 돌아보겠다는 꿈이 내 첫 번째 목표로 강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돈 버는 데 쉬운 일이 뭐가 있겠느냐만은,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고단했다. 나는 수박 시즌 파트 타이머였어므로 농산팀에 속해 있었다. '마트에서 농산물 관리하는 데 어려울게 뭐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각종 농산들을 받아서 창고로 옮기고, 정리하고, 팔기 위해 진열하고 나르는 등의 일들은 정말로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특히나 힘들었던 것은 조금만 모여도 나만큼 무게가 나가는 쌀과 수박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마트에서 일하는 동안 가장 신기했던 일은 과일이나 야채를 보관하기 위한 냉장창고에서도 땀이 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트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나는 복학을 앞두고 7일 동안, 꽤나 풍족한 기차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힘들긴 했어도 여행이라는 목표가 나를 지치지 않게 해주었다. 연장 근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나섰던 것도 돈을 벌면 하고 싶은 일이 확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행 자체가 처음은 아니었다. 고향 친구들과 열일곱 때부터 여름과 겨울 방학마다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고, 군인 시절 휴가 중 날짜가 맞은 친구들과 전라도 일대를 내일로로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 오롯이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기보다는 정신없이 놀다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한 번쯤은 꼭 혼자 떠나보고 싶었다. 아마 그때까지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일주일을 지내본 적이 없었을 거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나를 만날 수 있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었다.


 아래는 시간이 조금 흘러 그 여행을 기억하기 위해 썼던 글이다.


 시간이 지나도 두고두고 힘이 되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추억이 하나 있다. 홀로 기차를 타고 전국 곳곳을 누비던 일주일간의 기억은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나를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는 추억으로 오랫동안 곁에 남아있다.
순천만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방금 막 사회로 돌아온 나는, 같은 시기의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하고 싶은 일이 굉장히 많았고 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 자신감 덕분인지 여행을 위해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여행을 출발하는 그날까지 나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면 그 과정도 여행이 된다. 출발 하루 전날에는 그동안 여행을 준비하며 고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는 기쁨과 설렘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한밤중에 깨기도 하고,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눈을 뜨고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출발은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 아침이라면 피곤할 리가 없다.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모든 아침을 여행하는 날처럼 활기차게 만들 방법이 있을까?
안동에서
 여행은 일주일로 계획했지만 숙소는 첫 날인 안동부터 사흗날인 강릉까지만 예약했다.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것보다 일정 중 절반은 발이 가는 데로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대책 없이 시작된 첫 혼자만의 여행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해갔다.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도착한 정동진역에서 바라봤던 초록빛을 띈 바다는 지금도 눈을 감고 천천히 그려보면 선명히 떠오를 만큼 아름다웠고, 논골 담길의 아기자기한 벽화들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마침내 보이는 묵호항의 야경은 나를 망부석이 되게 만들었었다. 묵호는 항구의 화려한 불빛과 작은 해안가 마을의 소박함이 조화를 이루어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곳으로,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묵호 논골담길 아래에서,  야경은 차마 사진으로 전달할 수가 없다.
 물론 그 풍경들과 고유의 분위기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어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여행하는 동안 나를 더 성숙하게 해주었던 것은 지금은 거기에 없는 것들, 바로 여행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이다. 혼자 하는 여행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었다. 밤이면 같은 숙소에 묵는 여행자들과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강릉에서는 동갑내기 친구를 네 명이나 만나 밤새 떠들기도 했고 열 살 이상 많은 사람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단양에서는 숙소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래프팅까지 다녀와서 하루 만에 헤어지는 것이 대단히 아쉬운 사이가 되기도 했다.
단양과 제천 사이 어딘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음 날 다시 혼자가 될 때,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기도 하다. 홀로 타지를 여행할 때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기분 좋은 일인 만큼, 그 짧은 만남 후의 기약 없는 이별은 참 아쉽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꾹 눌러두고 꿋꿋이 각자의 길을 가는 그 여행의 과정이 우리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낙화’의 한 구절처럼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남으로써 더 소중해지는 인연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아쉬움과 미련 속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여행하며 만났던 이들과 앞으로 얼굴을 보며 살기는 쉽지 않겠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 굳세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인연이 닿으면 어디서든 다시 만날 것이다. 못 만나면 뭐 어떨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정동진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 열차에 올라 다시 홀로 창밖을 보고 있자니, 행복했던 기억과 함께 모든 순간들이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음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여행의 끝은 공허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은 일상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는 여행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마음으로 전보다 힘차게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여행 중 흐린 날, 기차를 기다리던 순간




 첫 여행의 첫날, 첫 기차에 오르던 순간의 설렘과 그 여행의 마지막 날, 마지막 기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던 순간의 씁쓸함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7일 동안 나를 찾아온 모든 감정들은 하나의 긴 여운으로 남았다.


여행은 반드시 무언가 느껴야 하고, 추억을 남겨야 하고, 인연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느끼든, 혹은 잠시 머리를 비우고 그저 '쉼'을 누리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자신만의 방식대로 여행을 한 것이다. 다만 나는 조금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을 첫 여행으로 뽑았을 뿐이다.   


 여행기의 마지막에 당차게도 '삶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글을 마무리했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느냐고 묻는다면 거의 모든 순간에 그렇지 못했다.  여행을 통해 내가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단정 지을 순 없다. 어쩌면 이는 단지 좋은 추억이라는 말과 함께 그저 사진 몇 장과 하나의 글로 남아있는 순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이 내일의 추억을 위한 하루가 아니듯, 여행은 무엇을 남기고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를 고민하기보다 그 시간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스물셋의 나는 그 첫 여행의 기억을 매개로 가끔이나마 지금의 나를 찾아와 위로를 건네기도, 살아갈 힘을 보태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7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날들 중 하나로 남았다. 이것으로 한 번쯤 떠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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