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희 Jun 23. 2024

우리는 늘 여행을 해야겠지

조지아 여행기 프롤로그

조지아 여행을 앞두고 있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알마티를 경유해 흑해를 접한 조지아의 휴양도시 바투미(Batumi)에 도착하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오 년 전, 그러니까 코로나바이러스19가 우리에게서 오랫동안 여행을 빼앗아 가기 전에 다녀왔던 마지막 여행과 무척 닮은 시작이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스물일곱 여름에 떠났던 그 유럽 배낭여행이 조지아에서 매우 가까운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카자흐스탄 항공사 '에어 아스타나'를 이용해 '부산 - 인천 - 알마티 - 이스탄불'로 이어지는 다소 피곤한 루트로 여행을 시작했었다.


마지막 배낭여행을 떠올리니 그때로부터 오 년이 흘렀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이스탄불에서 경험했던 모든 순간이 마치 어젯밤 꿈에서 일어난 일처럼 선명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붉게 물들인 노을, 금각만 뒤 언덕으로 솟아오른 아야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그리고 뾰족한 첨탑들, 걷다 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잔 소리, 문득 배고픔을 깨닫게 하는 설탕 바른 옥수수를 굽는 냄새…….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는데, 내게는 그때의 배낭여행이 그런 종류의 기억인 듯하다. 여행의 기억은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질 만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유럽으로 떠났던 2019년에 내가 여행한 시간은 50일 남짓하니 오분의 일이 채 되지 않는데, 돌아보면 그 50일이 한 해에 대한 기억의 거의 전부라고 할만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9년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기억하려 애를 쓰면 다른 사건도 몇 가지 더 떠올릴 수는 있지만 기억 속의 시간을 공정하게 배분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도 이스탄불을 떠올리는 방식처럼, 여행은 늘 그리움을 남기고 어느 때는 그 감정이 커져 - 돌아갈 수 없음에 - 슬픈 기분까지 느끼고야 마는 날이 있지만, 기억을 곱씹다 보면 삶에 그런 시간이 있었음이 참 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다. 지나온 생에 그리움과 아쉬움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삶이 텅 비어있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시간의 흐름 곳곳에 언젠가 추억할 만한 일들을 남겨놓는 것, 돌아보면 여행은 늘 그런 일이었다.


2019년 7월, 터키 이스탄불


문득 여행이 곧 삶이라는 문구에 관한 생각에 빠졌다. 여행이 곧 삶이라면, 삶 또한 여행이다. 여행하는 시간은 삶의 축소판과 같고, 삶은 여행을 확장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여행이 곧 삶이고 삶 또한 여행이라면 - 이 말에 모순이 있다고 해서 설명해야 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 번이라도 여행자였던 사람은 그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 우리는 모든 순간, 늘 여행을 해야만 한다. '늘, 늘 여행을 해야지.' 그 생각이 왠지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과연 나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이제 다시 여행을 해야 해!"


내 안의 무언가가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여행하지 않으면 내 안에 있었던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았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고, 코로나도 일상이 된 후 여행으로 일본을 한번 다녀오긴 했지만 잊고 있었던 여행의 감각을 깨우기에는 물리적인 거리나, 낯섦의 정도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다시 한번쯤 멀리 떠날 때가 되었다는 마음이 들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나라가 있었다. 조지아. 이스탄불에서 여행을 시작할 때 동쪽(카프카스)이 아닌 서쪽(유럽)을 선택하면서 먼 훗날을 기약하게 된 곳이었다.


조지아는 언젠가 꼭 여행하고 싶은 나라였지만, 막상 비행기표를 알아보기 시작하니 고민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직항이 없어 중앙아시아를 경유해야 하는 데다가,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나 푯값은 남아메리카나 극지방을 제외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투입할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선택지가 많았다. 그럼에도 조지아에 가기로 결정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라고 한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조지아 여행이 좋다는 단순한 후기는 꽤 들은 적이 있지만, 그곳에 관한 어떤 방송이나 책을 접한 적도 없었고 비행기 표를 끊기 전까지는 수도인 트빌리시 외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생각해 보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세부적인 정보를 찾고 분석하기보다는 그저 감을 따르는 것이 습관인 듯하다. 다만 그 '감'이라는 것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언젠가 들은 이야기, 언젠가 보았던 장면, 무언가 기억에 깊이 각인된 것으로부터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는 마땅히 그 선택을 따르고 싶다. '감'이 이끄는 곳으로 걷다 보면 솔직한 내 마음이 원하는 장면이 놓여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조지아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 다소 눈치를 보면서 - 입사 이후 가장 긴 휴가를 내고, 비행기 표까지 구매하니 정말로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할 때면 종종 '내 삶을 되찾은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고는 하는데, 나는 이것이 선택권의 문제라고 본다. 일상의 의무가 가득한 환경에서 우리는 늘 선택권을 잃어버린다.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하는 하루는 마치 영원할 것처럼 반복된다.


그러나 여행은 목적지를 정하는 순간부터 내게 꼭 하나를 선택하라고 등을 떠민다. 그리고 여행이 시작되어서도 당장 눈을 뜨면 어디로 향할지, 무엇을 먹을지,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하는 등의 의식적인 선택의 연속으로 하루를 채워야 한다. 어쩌면 여행은 그저 일상으로부터의 도망일지도 모르지만, 여행이 내게 직접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을 건네었던 수많은 순간을 되돌아보면 나는 얼마든지 도망치고 싶다. 지금의 조지아 를 시작으로 다시, 늘 여행하는 삶으로.


2024년 6월, 조지아 카즈베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