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조지아 여행기
- 날씨 요정이 아니면 어때
여행을 떠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기대가 앞서게 된다. 하지만 돌아보면 미리 상상한 모습 그대로 여행이 실현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여행을 통해 세상에는 내 힘으로 어찌할 방법이 없는 일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낄 때가 많았고, 이러한 경험 끝에 나는 점점 더 '계획표' 없는 여행을 선호하게 되었다. 여행이 기대대로 실현될 것인가 하는 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만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면 날씨가 아닐까 싶다. 바투미에 도착한 첫날, 적당히 구름이 끼었던 조지아의 날씨는 내게 노을이 지는 흑해의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바투미 숙소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어 파란 부분을 찾기 힘든 정도였다.
겨우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다시 잠들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직은 시차 적응이 좀 필요한 듯했다. 구름이 많이 끼긴 했지만 세상은 이미 아침이 온 듯 환했다. 내가 묵은 오르비 시티(Orbi city)는 바투미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흔하게 선택하는 숙소 중 하나였는데, 바로 앞이 해변이라 모든 객실이 '오션 뷰'라고 했다. 이른 새벽 창 밖으로 바다를 마주하니 그저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에는 아쉬워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잠들기를 포기하고 밖으로 나오자 바투미의 이른 아침이 낯설게 느껴졌다. 거리는 지난밤의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몹시 조용했다. 걷다 보면 이따금 마주치는 해안가를 달리는 사람들과 밤이 거리에 남긴 흔적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정적을 깨울 뿐이었다.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한 다음, 택시를 타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알리와 니노 동상이었다. 전날 바투미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느라 가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짐은 무겁고, 비는 쏟아지고, 목적지는 야외 공간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동상 구경을 또다시 뒤로하고 눈에 보이는 해안가의 작은 카페로 직행했다. 비를 맞으며 달려오는 나를 한 직원이 '가마르조바'라며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어떻게 보아도 비를 피하기 위해 어디든 들어갈 곳을 찾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헬로' 하고 대답 - 상황이 급하다 보니 준비한 조지아어가 나오지 않았다 - 을 하고는, 메뉴판을 훑어봤다. 그런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파라솔, 배쓰' 같은 것들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커피 같은 것은 없나요, 하고 질문을 하니 그녀는 다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있죠, 여기는 레스토랑이에요.'
메뉴판 위로 손짓이 향하는 곳을 보니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그날의 바투미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은 기온과 습도가 전혀 아니었다. 지난 유럽 여행을 떠올리며 나는 '아이스도 있냐'라고 묻자 직원은 역시나 아메리카노는 '온리 핫'이라고 대답했다. 덥고 목이 말라 메뉴판을 다시 좀 살펴보니 'ICED COFFEE'라고 적힌 메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스드 커피'를 '노 스위트'로 주문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산대가 있는 공간이 협소해서 정말 작은 가게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입구의 좁은 통로를 지나오니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로 해안까지 뻗어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이베리아 비치(Iveria Beach)라는 이름의 바투미 해변의 가게는, 바닷가로 시야가 탁 트여있어 자리를 잡고 앉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주문한 '노 스위트 아이스드 커피' 커피까지 마시기 시작하니, 날씨에 대한 불만도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비가 내린다는 사실도 환경과 마음이 변하면 몹쓸 날씨에서 감성적인 날씨로 변하는 법이다.
커피를 마시다 보니 비어 탭이 보여 그 자리에서 생맥주까지 한 잔 시켰는데 예상과 달리 라거가 아닌 에일 맥주가 나왔다. 물론 이미 '감성'에 빠져있던 나에게 라거냐 에일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테이블 앞의 해변가에는 비가 내렸다 잠깐 햇볕이 비추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고, 나는 별다른 계획도 걱정도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 점원이 빈 잔을 가져가며 무어라 말하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오케이, 땡큐' 했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생맥주가 한 잔 더 나와 당황한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또 생각지도 못하게 제대로 된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맥주를 두 잔이나 마시게 됐지만 나쁘지 않은 아침이었다. 아니, 비를 맞으며 시작한 것치곤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비가 그친 후 나는 카페를 나와 알리와 니노 동상을 비롯한 바투미 해양공원의 몇 가지 건축물을 구경했다. 그리고 바투미 센트럴 모스크(Batumi Central Masjid))와 성 니콜라스 성당(St. Nicolas Church)까지 잠깐 구경한 다음, 시내를 구경하다 유럽광장으로 갔다. 광장에는 황금양털을 든 메데이아가 서있다. 사랑을 위해 가족도 나라도 버린, 그러나 끝내 그 사랑에 배신당하고 마는 그리스신화 속의 인물이다. 메데이아는 너무나도 사랑했던 남편이 자신을 배신하자 남편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모조리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삐뚤어진 복수의 화신이다. 그 이야기의 이미지를 담으려고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장에 우뚝 솟아 축 늘어진 황금양털을 들고 있는 동상의 모습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메데이아 동상 아래에는 분수가 있고 주변으로는 벤치가 여럿 놓여 있다. 그리고 광장 둘레를 따라 식당과 카페 등이 늘어서 있다. 유럽 광장에서 평화로운 주말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함께 마음이 편안해졌다. 트빌리시행 기차를 타기까지 세 시간쯤 남은 시점이었다. 광장에서 잠깐 쉰 다음에는 바투미 해변가의, 비행기가 아주 가깝게 지나간다는 지점으로 구경을 갈 생각이었다.
광장 한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일이 잦은 하루여서 조금씩 젖는 것도 익숙해지고 있는 참이었는데, 그때는 빗방울이 그리 굵지도 않아서 나는 그대로 비를 맞고 야외 좌석에 앉아 있었다. 금방 멈출 소나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빗방울은 계속해서 굵어졌고 웬만한 비는 우산 없이 맞고 다니는 현지인들도 광장 한 편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도 급히 눈에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간판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들어간 곳은 알고 보니 '테이크 아웃 전용 와플숍' 정도 되는 매우 협소한 가게였다. 계산대 앞에 사람 두 명이 서면 가득 차는 정도가 전부인 공간이었다. 그 좁은 곳에 발을 들여놓으니 계산대 너머에서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왠지 머쓱해져서 와플을 주문했다. 딱히 먹을 생각이 없었던 와플이 곧 내 손에 들렸지만 마땅히 먹을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게 앞으로 천막을 설치한 야외석이 있기는 했지만 비가 워낙 많이 내려 이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그대로 계산대에 서서 와플을 먹기 시작했다. 가게의 두 점원이 그런 나를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익숙한 일인 듯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와플을 먹는 동안 먹구름은 점점 두껍게 하늘을 덮어 낮인지 초저녁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빛을 차단했다. 그러다 천둥 번개까지 치기 시작해서 나는 해변과 비행기 구경을 가기는 글렀구나, 하고 계산대 앞 한쪽 구석에 놓아둔 캐리어에 앉아 유럽광장에 비가 쏟아지는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정말 어디론가 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빗줄기였다. 비 내리는 풍경을 얼마동안 지켜보고 있으니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남자가 비를 맞으며 천천히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분수로 뛰어들었고, 아버지는 분수 위에서 아들을 들어 올려 물에 적시기도 하며 장난을 쳤다. 부자가 사라지고 조금 뒤에는 한 커플이 다시 분수로 뛰어들었다. 쏟아지는 비와 솟아오르는 분수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비가 오면 분수로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 궂은 날씨에 대해 불평하는 동안, 누군가는 빗속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비를 맞으며 여행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낫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비 내리는 풍경을 지켜보는 동안 서서히 비가 잦아들었다.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가 맞고 걸을 수 있는 수준이 되기까지 한 시간도 훌쩍 넘게 걸렸다. 그동안 그 좁은 와플가게의 공간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슬슬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내내 무표정이었던 점원이 옅은 미소로 인사를 해주었다. 곧 트빌리시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다. 나는 그렇게 비를 맞으며 바투미를 떠났다. 왜인지 화창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야속할 정도로 비가 쏟아지던 날, 바투미 유럽 광장의 어느 작은 가게에서 한참 동안 비가 내리는 장면을 바라본 일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그 장면을 뒤로하고 트빌리시로 향하던 기차에서 나는 인터넷으로 트빌리시의 일기예보를 찾아봤다. 내가 머무르는 동안 매일 비가 온다고 되어 있었다. 물론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실망스러운 느낌도 아니었다. 기차에 앉아 날씨 걱정을 하려니 새벽부터 깨어 있었던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정말 앞으로 매일 비가 오려나, 내가 말로만 듣던 '날씨 요괴' 그런 건가. 이처럼 걱정스러운 생각에 빠지려고 하면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목격한 광경들이 내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날씨 요정이 아니면 어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