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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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잘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을까. 학교 수업을 무리 없이 잘 따르던 나를 보고 담임 선생님은 엄마에게 나를 영재 수학 수업을 듣게 하자고 제안했다. 자녀의 출중함을 인정받은 기분에 엄마는 기쁘게 찬성했으나 수학과 나의 오래된 비극의 역사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한다. 내게 영재 수학반 수업은 개나리처럼 진한 노란색의 B4용지 크기의 왕수학 책, 끝 간 데 없이 자리 수가 길게 나열된 숫자들을 더하고 곱하느라 식은땀을 줄줄 흘렸던 시간들, 그리고 생애 처음 맞아보는 빨간 비가 가득한 갱지의 시험지로 요약된다. 주간 평가 시험 후 받아 든 20점짜리 시험지를 다급하게 가방 속으로 구겨 넣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이후 나는 내가 수학이라는 것에 영판 재능이 없는 것은 물론, 수학 머리가 없이 아주 멍청하다는 생각을 하며 수학을 외면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내게 심어준 인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수학 공부를 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흘려보냈다. 엄마도 나를 수학 못하는 작은 딸로 여겼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수학의 영재는 아니었을 망정, 수학의 모든 부분에 영 재능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싫어하던 수학 공부를 꾸역꾸역 하던 중에 도형의 각도를 계산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무질서하게 나열된 것처럼 보이는 수열에서 규칙을 찾아내는 과정도 즐거워했으며, 수수께끼 같은 사건의 확률을 계산해 낼 때는 희열을 느꼈다. 이제는 맘 잡고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던 고등학교 3학년에 온라인으로 만난, 수열의 규칙을 알고 싶다면 일단 수를 그냥 쭉 나열해 보라고 침 튀기며 강조하던 나의 은인, 박승동 인터넷 강사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수학의 많은 부분이 의외로 내 적성에 잘 맞는다는 것을 영원히 모르고 살 뻔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내 잘못이 아니었던 것이 참 많다. 어린 날 엄마 아빠에게 호되게 혼났던 기억 중 어느 날엔가는 당신께서도 그 삶이 처음이고 버거웠던 탓에 본인들에게 잔뜩 난 화를 언니와 내게 잘못 풀어낸 때도 있었음을 이제는 안다. 어떤 학우들을 유난히 아끼던 어느 선생님의 관심은 부모님의 재력과 정성이 흰 봉투 안에 담겨 전해지지 않는다면 내게 올 수 없던 것이었음을 시간이 지나니 깨닫게 된다. 수업 중에 이해가 되지 않아 나의 이해력과 지능을 의심했던 순간들 중 어느 순간은 선생님의 귀찮음 때문이었음도 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세상의 많은 것들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운으로 또 때로는 그저 이어받았기에 얻게 되는 것임도 나는 깨닫는다.
산업디자인에서 사용자 경험 (User Experience: 사용자가 어떤 시스템이나 제품, 서비스를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이용하며 겪는 통합적인 경험)의 중요성을 주장한 미국 학자 도널드 노먼 (Donald A. Norman) 은 자신의 저서인 디자인과 인간 심리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에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사용할 때 헤매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오류가 아닌 나쁜 디자인의 탓이라 말한다. 이 단순 명료한 명제는 디자인의 영역을 벗어나 우리 삶 곳곳에서도 적용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개개인의 삶에서 개인의 힘으로 전복시킬 수 없는 잘못된 경험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나쁜 디자인"에 귀인 해야 한다.
나와 수학이 멀어졌던 이유도 사실은 엄마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잘못 디자인된 학습 시스템 때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