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함이 그리운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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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음식을 참 잘하셨다.
아마 내 고향이 전라도 광주라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은 충분히 인정될 것이다. 할머니가 자주 만들어 주시던 뜨거운 기름에 달달 볶은 감자채, 빨간 고춧가루로 텁텁함 없이 깔끔하게 조린 생선 조림, 그리고 짭조름한 향의 불고기 반찬이 자줏빛 도는 밤색 상 위에 푸짐하게 차려졌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외할머니의 손맛을 보고 자란 엄마 손맛도 만만치 않다. 사실 엄마는 일하는 바쁜 직장인인지라 요리하는 것을 썩 즐거워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엄마가 만들어 주시는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게다가 전라도 음식이란 무릇 인심 넉넉하게 만들어 이러다간 배가 터지겠다는 때까지 대접하는 것이 미덕이다. 내 고향 광주를 생각하면, 그 손맛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미료보다 더 강력한 힘이 발휘되어 차려진 진수성찬과 그릇을 더 놓을 자리 없이 푸짐하게 넘치는 상차림, 그리고 그 음식을 풍족하게 나누던 시끌벅적함이 함께 떠오른다.
음식이라는 것은 함께 나누어 먹어야 제맛인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마주한 대도시는 내게 깡깡 마른 가뭄에 쩍 갈라진 땅을 떠올리게 했다. 전 세계에서 날고 긴다는 멋진 사람들이 모여 공격적으로 살아가는 뉴욕이 그러했고, 똑똑하고 영민한 사람들이 촘촘히 모여 바삐 살아가는 서울이 그랬다. 대도시는 세상 곳곳의 오만가지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지만 그 음식들을 온전히 즐기고 누리며 사는 이들은 흔히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사람들은 제 삶을 이고 지고 버텨내느라 정신없어 보였고, 많은 이들에게 음식이라는 것은 행복하게 즐기는 환상의 특급 열차라기보다는 한 끼 저렴히 빨리 때워야 하는 무거운 현실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곳에서 밥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재미는 상실한 지가 오래되었다.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자연스러운 행위로 여기며 자라온 나는 어디서부터 그런 풍토가 시작된 것일까 곰곰이 고민해 보았다. 환경적으로 평원이 많은 호남지방이라 농사를 많이 짓다 보니 쌀의 풍요로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을 넉넉히 나누게끔 한 것일까. 그런 넉넉함은 시대의 힘든 절기에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되지 않았나 싶다. 1980년 5월 광주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온몸으로 울부짖던 그때 사람들은 쌀이 필요한 곳에 아낌없이 제 집의 식량을 보탰고 어머니들은 네 자식이고 내 자식이고 상관없이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었다 들었다. 넉넉한 마음이 시대를 타고 흘러오던 곳에서 유년 시절을 지내온 나는 이 쌀쌀한 대도시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여전히 고민한다.
그 고민이 무색하게 나는 갈수록 날카로운 서울 깍쟁이가 되어 입은 점점 짧아지고 몸이며 마음이 깡깡 말라간다. 광주 집에 갈 때마다 그런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먹고 싶은 음식이 없는지 묻던 엄마 아빠가 눈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