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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인리 Jul 16. 2019

테니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Photo by Moises Alex on Unsplash


일요일 밤엔 어쩐지 잠이 잘 오지 않는다. 20년이 넘도록 취미인 테니스에 목숨을 걸고 운동하는 아빠를 따라 종종 테니스 경기를 보곤 했는데, 잠들기를 포기하고 밝힌 아이패드 디스플레이에서 눈에 띈 건 마침 생방송 중이던 노박 조코비치와 로저 페더러의 2019년 윔블던 경기 결승전이었다. 마지막 세트라 곧 끝나겠지 싶었는데 페더러가 이기나 싶으면 조코비치가 다시 게임을 가져가고 조코비치가 이기려나 싶으면 다시 페더러가 따라잡는 업치락 뒤치락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세트는 쉬이 마무리되지 않아 결국 게임 스코어 12:12 가 되었다. 한없이 길어지는 게임으로 인해 지치는 선수들을 보호하고자 이번 해부터 변경된 경기 룰에 따라 타이브레이크 (2점 이상의 스코어 격차를 둔 채로 7점을 먼저 따는 선수가 승리하는 룰)에 이르렀다. 약 다섯 시간 동안의 끈질긴 랠리 끝에 우승컵을 든 선수는 조코비치였으나 그 둘 중 누가 이겨도 충분히 박수받아 마땅한 게임이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8번의 윔블던 우승을 차지한 테니스 황제 37 세의 페더러도, 슬럼프를 겪다 작년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세계 1위의 자리를 탈환한 조코비치도. 초록빛 코트에 깔린 긴장감에 압도되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것은 그 두 선수가 아니라 화면 너머의 나였던 것 같다. 그 긴 랠리를 견디고 있는 그들의 체력도, 그 팽팽한 긴장감을 매 서브마다 감내하는 그들의 정신력도, 그리고 그 오랜 기간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려 훈련하고 또 훈련할 그들의 지구력도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참 가혹한 운명을 쥐고 살겠다고도 생각했다. 많은 스포츠 경기가 그렇겠지만, 선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무조건 져야만 하는 게임을 선수로 생활하는 내내 지속하며 지내야 할텐데 참 외롭고 어려운 싸움이겠구나 감히 가늠해본다.


대학 때 체육교육과를 전공했고 승부욕과 운동이라고 하면 일가견이 있는 나의 아빠에게 학창 시절 종종 체육에 관한 팁들을 묻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운동회 전날에 나는 전교생이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단거리 달리기가 걱정되어 어떻게 하면 잘 달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아빠는 내게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옆이나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 신경 쓰며 달리면 앞으로 제대로 향할 수가 없다고. 초중고등학교까지 거의 매 해 참여했던 달리기 시합이라, 그다음 날 결과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빠의 그 말이 내 인생의 외롭고 힘겨운 순간마다 종종 떠오른다. 앞으로 향해야 할 때는 집요하게 내 앞으로만 시선을 향하는 것. 다른 이가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내 앞을 향해 집중하는 것. 그 마음이 나를 바르고 곧게 앞으로 향할 수 있게 했다.


조코비치와 페더러의 다섯 시간 동안의 숨 막히는 랠리는 끝이 났나 싶으면 다시 원점으로, 또 끝인가 싶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곤 했다. 치열한 그들의 경기를 보며 내가 열심히 달리는 이 길도 아직 끝이 난 게 아니라서 나는 아마 끝날 때까지 집요하게 앞을 향해 계속 달리게 되겠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새벽 세 시가 훌쩍 넘은 시간 잠들어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월요일을 보냈지만, 2019년 윔블던 대회의 진정한 승리자는 그 역사적인 랠리를 생방송으로 지켜본 내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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