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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인리 Jun 25. 2019

보통의 하루

그 일상을 지킨다는 것의 무게

Photo by Adam Sherez on Unsplash


어느 퇴사 날 아침, 매일같이 내 주위에 존재하던 것들이 생경하게 눈에 띄었다.

횡단보도 앞 아침부터 뜨겁게 내리쬐는 땡볕 아래 서서히 달궈지는 아스팔트의 열기를 그대로 떠안으며 도로 공사를 하는 아저씨가 보였고, 버스 정류장 앞에는 얼마나 일찍부터 장사를 시작하셨을지 모르게 벌써 파라솔을 펴고 과일을 정갈하게 깔아 놓고는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보였고,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는 커다란 금반지를 낀 왼 팔을 차창에 걸치고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 부르며 운전하는 택시 기사님이 보였다. 아마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내 일상에 함께 흐르던 풍경이었을 텐데, 이제 몇 주 간은 겪지 않아도 될 번잡한 출근길이라 생각하니 각자에게 주어진 그날의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내가 한 10살 무렵이었을까. 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딸이자 평범한 학생이었다. 학교에는 내가 부러워하는 특별한 친구들이 많았다. 얼굴이 예쁘고 멋진 친구, 무용을 잘하는 친구, 첼로를 잘 켜는 친구, 말을 재미있게 하는 친구, 친구가 많은 친구, 집이 부자인 친구, 등등. 나 자신이 부러워하는 특별함을 나는 갖지 못한 것 같아, 그 평범한 내가 조금 더 특별해지기를 원했다. 어느 저녁에 나는 집에서도 일을 하느라 수북하게 쌓인 종이들에 둘러싸여 정신없던 엄마에게 특별해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보통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네가 알게 될 거라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좀 더 지낼 필요도 없이 엄마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평범함의 소중함과 어려움을 그 어린 마음에도 이해했던 것 같다.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나는 이 사회의 평범함이라는 것이 마치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만 경험하면 지옥철이라는 말이 충분히 이해되는 출퇴근길의 가득 찬 지하철 칸이 그랬고, 업무 방식의 효율성과는 관계없이 야근은 필수라고 생각하는 조직의 문화가 그랬고, 쥐꼬리만 한 월급에 주말 출근 경비는 따로 주지 않지만 너네는 나와서 일하라고 하는 사장이 그랬고, 돈을 받고 정당한 업무를 진행하는 공간인 회사에서 업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자에게는 약하게 굴고 약자에게만은 강하게 구는 행태라는 것을 몸소 시연하는 사람들이 그랬고, 야근을 불사하고 일을 해 번 돈으로는 대출금을 갚고 이것저것 생활비로 조금씩 나가다 보면 통장이 텅장되는 것쯤은 순식간이라는 것이 그랬고,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는 가족을 부양해야 해 아무 감정 없이 ATM 기계처럼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그랬고, 개미처럼 구슬땀 흘려 번 직장인의 월급으로는 캥거루족이 아닌 이상 서울에서 아무것도 하고 살 수 없다는 현실이 그랬고, 수입이 얼마가 됐든지 간에 서울에서 일하는 회사원 중 삶에 만족감을 갖고 행복하다는 사람을 정말이지 찾기 어렵다는 점이 그랬다. 그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이 시대와 사회에서 일상의 평범함이라는 것이 일찍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저녁에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는 일상.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번 돈으로 어느 정도는 저축을 하고 또 어느 정도는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지출할 수 있는 삶. 햇볕과 바람이 좋은 날엔 휴가를 쓰고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빛과 바람을 쐬는 여유가 있는 인생.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곳에는 적대감이나 공포의 분위기보다는 우정, 의리, 동료애 그런 단어가 어울리는 따뜻한 분위기인 것. 내가 꿈꿔오던 그 평범함은 신기루처럼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는 곳에서 우리 모두는 일상을 꾸벅꾸벅 견뎌 낸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아빠가 당신께서는 범인 (凡人)이라며 아주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음을 인정한다고 처연하게 웃으며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아빠에게 범인에 "비 ()" 하나 붙이면 비범해지는 것이니 평범함이 비범함이 되는 것이 별다르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때 그에게 했던 나의 말이 유효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보통인 우리 가족의 일상을 위해 매일의 일상을 꾸준하게 견뎌온 그의 평범함은 얼마나 비범한 일이었던가.


우리 모두의 보통의 일상이 지켜지는 환상의 날은 천천히라도 다가오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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