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허브원 '라벤더 축제'
내년 1월이면 나와 남편은 결혼 33주년을 맞이한다. 결혼 전 4년을 사귀었으니 처음 만나고 지금까지 만 36이 되었다 올해 33세로 결혼 할 생각은 물론 달달한 연애도 절대 거부하는 큰 딸은 '엄마는 어떻게 한 남자랑 그렇게 오래 살아? 그것도 아빠랑?'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물어본다. 내가 볼 땐 꽤 괜찮은 남편이고 더구나 지들한테는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줄 듯 설설 기는 아빠를 왜? 아마도 나름 페미니즘을 옹호하고 사회적으로 여자들이 받는 차별에 분개하면서도 집안일을 나눠 하지 않으려 하고 가끔 소파에 누워서 물좀..., 밥 안줘? 하던 아빠의 모습을 봐서 그런가?라고 짐작할 뿐이다.
물론 셋이나 되는 아이들이 어릴 때는 워킹맘으로써 직장에서의 퇴근이 집으로 출근하는것과 마찬가지인 상황들이 다반사로 있을 땐, 어쩌다 마음이 내켜서 조금 도와주고 온갖 생색을 내던 남편하고 계속 사는게 맞나 수시로 고민한 적도 있었다. 사실 집안일을 좀 등한시 하는 것 빼고는 나무랄데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좀 받기 시작하고부터 둘이 갈등을 일으킬 일이 없어졌다. 음식 만드는 것, 설겆이 하기 등 부엌일은 즐겨하면서도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은 유난히 싫어하는 내가 그쪽으로 도움을 받으면서 스트레스가 없어지니 부부금슬이 오히려 신혼때보다 더 좋아졌다.
정년퇴직을 6년이나 남겨놓고 명예 퇴직을 선뜻 결정한 것도 어쩌면 남편과의 사이가 너무 좋은 것도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일지 모르겠다. 34년 가까이 근면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남편은 2년전부터 거의 퇴직 상태가 되었다. 완전 퇴직은 아니고 오전에 잠깐 출근했다 바로 퇴근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자기 손으로 식사를 챙겨 먹은 적이 거의 없던 남편은 혼자 점심 먹는 것은 물론 낮 시간에 혼자 집에 있는 것도 불편해 했다. 그 즈음 나도 번아웃이 왔고 특히 불면증에 시달리며 출퇴근 길에 졸면서 사고 날뻔한 일을 몇번 겪고 나서는 옳다구나 하고 퇴직을 결정했다.
퇴직을 하고 나니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가고 싶은 데도 많아졌다. 백화점, 주민 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노래교실, 라인댄스 프로그램도 참여해야하고 일주일에 하루쯤은 도서관이나 커피숍에 앉아 읽고 싶던 책도 읽어야 하는 등 내가 하려는 많은 활동이 남편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퇴직을 하고도 자기랑 안놀아주고 점심도 같이 안먹어 준다고 떼쓰는 어린애처럼 구는 남펴과 협상을 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각자의 영역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금요일 부터 일요일까지 3일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토/일 주말은 어차피 시골에 있는 세컨 하우스에 가기 때문에 금요일엔 뭔가 특별하 둘 만의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사실 금요일마다 둘이 하는 일들이 그렇게 특별한 것들은 아니다. 요새 부쩍 많이 생긴 시 외곽의 예쁜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 앞에 놓고 한없이 멍때리기를 한다던가 이 세상에 싸고 좋은 것은 없다지만 그래도 싸면서도 맛있다고 소문난 가성비 뛰어난 맛집을 검색해서 소문대로 맛있는지 확인 하는 일도 주요 일과 중의 하나이다.
오늘의 행선지는 정읍에서 한창 진행중인 라벤더 축제의 장이었다. 보라색을 너무 좋아해서 별명이 보라순이인 내게 보라색천지의 라벤더 언덕은 그야말로 힐링 그 자체였다. 거기다 곳곳에 놓여 있는 색색의 파라솔은 환상의 장난감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우리처럼 그곳을 찾은 사람들이 라벤더를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찍어주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탁트인 풍경과 맑은 하늘, 온통 보라보라한 라벤더, 무엇보다 오래살다 보니 생각도 취미도 점점 비슷해져가는 오랜 친구, 짝꿍과 함께 하는 특별한 금요일의 데이트, 오래된 연인처럼 달달한 오늘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