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딸] 아직 엄마 옆에서 자고 싶어
“왜 맨날 나만 엄마 옆에서 못 자?"
첫째 딸이 갑자기 툭 꺼내 놓은 한마디. 옆에서 듣고 있는데 말이 묵직한 게 진심이 담긴 것이 느껴졌다. 둘째는 갑자기 고열이 나서 절인 배추처럼 축 쳐져서 잠이 들었다. 엄마는 밤새 엄마가 열을 재고 간호를 해야 해서 그렇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사실 딸의 이야기와 엄마의 대답의 시제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지금 다섯이 한 방에서 자고 있다. 방 개수에 비해 비효율적이지만 아직 아이들을 독립시키지 못했다. 큰 사이즈 침대 두 대를 붙여 놓아서 네 명을 누일 수 있다. 수용 인원이 넷인데 사람이 다섯이면 어떡하지? 이런 경우 밀려나는 1순위는 아빠다. 나는 바닥에 매트리스 같은 걸 펴고 잔다. 불편하지는 않다.
아이가 둘이라면 엄마가 두 아이들 사이에 껴버리면 자리싸움이 그래도 덜 발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셋이다 보니 엄마가 한 명을 배에 올리고 자지 않는 한, 누군가는 엄마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셋째의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 부부의 숙제였다. 아이가 둘일 때에도 둘이 선호하는 위치가 (엄마의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똑같아서 그걸 갖고도 싸웠었기 때문에 간단한 결정사항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요구가 과하게 디테일할 때가 있다.
결론적으로 첫째 > 둘째 > 엄마 > 막내 이런 순서로 자리를 배치했다. 막내는 자다가 수유도 하고 엄마가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엄마 옆에서 자야 한다고 위에 두 아이들을 설득했다. 아이들이 이해해줘서 엄마 옆에 한 자리를 아기에게 내어주는 데에는 큰 이슈가 없었다. 관건은 나머지 한자리였는데 결국 둘째의 것이 되었다. 그 이유는 결국 나이 때문이다.
내가 첫째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갈등 상황이 발생이 일어나게 되면 첫째의 입장을 이입해보게 되는 편이다. 엄마에 대한 애착의 크기가 둘째가 첫째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을까? 수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아직 사춘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첫째도 둘째 못지않게 엄마의 품을 원할 것이다. 둘째를 더 배려하게 된 이유는 애착의 크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첫째에게는 양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그래도 4년 더 산 경험을 통해 발달해 있다고 믿기에 둘째를 납득시키는 것보다는 첫째를 설득하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첫째들은 양보를 강요당하기 일수다. 그것이 부모 입장에서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집집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우리 집에 경우는 첫째가 아직까지는 자신의 신체적, 지능적 우위를 활용해서 둘째보다 이득을 취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에 양보를 시키는데 큰 거리낌이 없긴 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발생하는 착각은 첫째에게 엄마 아빠와 같은 어른 수준의 배려심이나 인격을 무의식 중에라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아이다운 반응을 보이면 순간적으로 실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뒤늦게 이 실망감의 정당성에 대해 곱씹어본다.
이번에 딸이 엄마 옆에서 자고 싶다는 말이 나에게는 그 생각의 착오를 새삼 환기시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초등학교 3학년의 이미지는 어떨까? 아무리 첫째라고 한들 3학년은 어린아이일 것이다. 아직 엄마의 온기를 충분히 느끼고 싶어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지 않을까?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것이지 마음 한 켠에는 양보를 하면서 생긴 부족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을 채워주기 위해 부모가 조금 더 신경을 써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가 친구들이랑 길을 가다가 엄마 아빠를 발견해도 고개를 돌려 못 본 체할 때가 올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조심스러운 시기가 올 것이다. 너무 섭섭하겠지만 언젠가는 왔다가 지나가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아이가 붙어 있고 싶어 할 때 붙어 있도록, 아이가 섭섭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아이다운 모습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사랑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