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고민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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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고민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남들보다 약해 빠졌다는 건 이상하게도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곳으로 출근하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나에겐 너무 힘이 들었다.
물론 처음엔 나의 정신력을 탓했다.
'남들은 다 하는 걸 너는 왜 어려워하냐'
다들 꿈일 잃어버린 듯 잊어버린 듯 살고 있는데
왜 너 혼자 꿈을 이루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발버둥이냐며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엄청 탓했었다.
그럴 때면 통장의 잔고를 미래 결혼식 따위에
내어주지 않은 채 홀라당 비행깃값으로 써버리는 것이
나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이렇게 떠나오니 나의 문제에 대해 고민할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꽤 현실적인 문제들
돌아가면 이제 뭘 먹고살아야 할지
돌아가면 이제 그는 잊을 수 있는 것인지
돌아가면 나는 강해질 수 있는 것인지
한국에서는 생각하기도 싫어
일부로 모르는 척 꽁꽁 싸 두었던 무수히 많던 고민들을
하나씩 꺼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막상 꺼내보니, 이 고민들 중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이 고민들 중 하나도 이 풍경 앞에선 별것도 아닌 일 같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이 모르는 길에서 헤매지 않고 숙소로 잘 돌아가는 것
내일 돌아가는 날인 것을 기억하는 것
그렇기에 공항 가는 법을 알아두는 것
서둘러 고민들은 주워 담은 채 깜깜해지기 전에 지도를 꺼냈다.
잠시나마 고민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알프스 만년설 앞에서 제 고민은 조각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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